"300명이 하루 반 동안 끌고 와"…삼청동서 온 경회루 돌기둥

국립문화재연구원, '국역 조선시대 궁·능에 사용된 석재 산지' 보고서
조선 궁궐 석재, 노원·불암 등서 캐내…95% 이상은 분홍빛 화강암
"경회루 석주(石柱·돌기둥) 1개를 삼청동에서 떠내어 묶어서 끌어왔다. 병사 300명을 데리고 1일 반 동안 끌어서 궁 안으로 가져왔다.

"
조선 후기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을 기록한 책 '영건일기'(營建日記)는 공사가 한창이던 1865년 5월 26일의 작업을 이렇게 전한다.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누각인 경회루는 모두 35칸.
영건일기는 이와 관련, "경회루는 기둥이 48개인데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에서 각각 16개를 담당해 (돌을) 떠서 가져왔다"고 설명한다.
조선 왕조의 역사를 간직한 궁궐을 지을 때 쓴 석재는 어디서, 어떻게 왔을까.

15일 국립문화재연구원이 공개한 '국역 조선시대 궁·능에 사용된 석재 산지' 보고서에 따르면 궁궐에 쓰인 돌은 한양도성 내, 서교(西郊), 동교(東郊) 등에서 캐내거나 떠온 것으로 추정된다.

보고서는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외규장각 의궤 등 총 79종의 문헌, 564건의 기사를 토대로 궁궐과 왕릉을 조성할 때 쓰인 석재가 어디서 왔는지 분석했다.
돌을 뜻하는 '석'(石), 돌산이나 바위에서 석재로 쓸 돌을 캐거나 떠낸다는 의미의 '부석'(浮石), 돌을 다루는 장인인 '석수'(石手), '석공'(石工) 등을 중심으로 관련 내용을 살펴봤다.

연구원은 "분석 결과, 문헌 기록에 등장하는 석재 산지는 한양도성 내, 동교, 서교, 기타로 구분할 수 있고, 지명은 현재의 지명과 대부분 일치했다"고 설명했다.

조선 시대에 삼청동을 포함한 사대문 안쪽은 풍수적인 이유에 따라 부석이 금지된 바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경복궁 중건했을 당시에는 삼청동에서 돌을 떠내 쓴 사례가 기록돼 있다.
광해군(재위 1608∼1623)이 서울 인왕산 일대에 인경궁을 지을 때는 규모가 큰 석재를 지금의 노원구와 강북구에 해당하는 노원, 불암, 우이 등 동교에서 부석한 것으로 파악된다.

한양도성 사소문(四小門)의 하나로 서북쪽에 있는 문인 창의문 바깥의 사동, 녹번, 옥천암, 응암동, 사암동 등의 일대에 해당하는 서교는 17∼18세기에 주요한 부석처였다.

주요 석재 산지에서는 채석 작업이 이뤄졌음을 알 수 있는 흔적도 확인됐다.
연구원은 "삼청동의 북악산과 노원의 불암산, 북한산의 우이동, 영풍정(현 창신동) 등에서 궁궐에 사용된 석재와 동일한 암석을 확인했고, 암반에서 채석 흔적도 관찰했다"고 설명했다.

왕실의 위엄을 나타내는 주요 건축물인 궁궐에서는 어떤 돌을 썼을까.

연구원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종묘에 사용된 석재 총 9천961점을 조사한 결과, 담홍색 화강암이 95% 이상을 차지했다고 설명했다.
담홍색 화강암은 분홍빛을 띠는 화강암으로, 서울 일대에서 주로 볼 수 있다.

돌은 무겁고 운반하기 쉽지 않은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구할 수 있는 석재로 궁궐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연구원 관계자는 "앞으로도 다양한 석조 문화유산을 조사하고 분석해 궁궐 복원에 사용할 수 있는 대체 석재 선정을 위한 근거 자료를 확보할 것"이라고 말했다. 보고서는 국가유산 지식이음 누리집(https://portal.nrich.go.kr)에서 볼 수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