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먼 곳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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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재현의 탐나는 책2015년의 어느 날을 기억한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었고, 막 출간된 한 문학상의 수상작품집을 사든 채 버스에 앉아 읽고 있었다. 서울역을 지나던 중이었을까, 어두운 하늘 아래로 높은 건물들이 노란빛을 뿜어내며 고적하고 호젓한 야경을 완성하고 있었다.
정지돈 문학과지성사, 2016
“문학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나요?”
그 풍경을 기억하는 건, 책을 읽다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리라. 그때 내 마음속엔 이런 문장이 반복됐다, 그래 이런 걸 기다리고 있었어. 그날 내 손에 쥐어진 책은 <2015 제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었고, 읽고 있던 소설은 <건축이냐 혁명이냐>였다.
1960년대는 예술의 꽃이 지금과 달리 건축이었고, 각 고등학교의 수재이며 감성이 충만한 까까머리들이 건축과를 선택해 대학을 가곤 했으며, 각종 건축잡지들이 생겨나고 유학파 건축가들이 출몰하던 시기였기에 잊힌 건축가들도 르꼬르뷔지에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알았을 텐데 그들의 야망과 꿈은 왜 이렇게 낡고 초라하게 남아버렸나 하는 얘기를 우리는 나눴고, 조규엽은 디자이너로서 내가 쓴 가상의 전기에 가상의 스케치와 사진 등을 넣으면 어떨까하는 이야기를 했다. <건축이냐 혁명이냐>
조선의 마지막 황세손 이구를 다루는 이 소설은 국경을 넘나들고 당대의 다양한 고유명사와 사건들을 종잡을 수 없게 횡단하며 이구의 전기를 파편적으로 다룬다. 그러나 내게 중요했던 건 소설에 사실과 허구가 얼마만큼의 비율로 섞여 있느냐가 아니라, 이 소설이 무언가 묻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군사정권의 회유를 받고 호랑이굴에 들어가는 심정으로 조국에 돌아왔지만 별다른 행위를 하지 못한 채 어눌한 한국어를 아예 닫아버린 이구. 현대라는 시대에도 서울이라는 공간에도 도무지 정을 붙일 수 없다는 듯이 과거 세대의 세계 변혁을 향한 원대한 꿈과 계획이 어째서 스러졌는지 파고드는 현대의 소설가-화자. <건축이냐 혁명이냐>는 예술이 세계를 바꿀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냉담히 응시하면서도, 정말 그렇냐고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느냐고 묻고 있었다. 그 질문에 관통되어버린 나는 정지돈의 첫 책을 손꼽아 기다렸고, 이듬해 <내가 싸우듯이>가 찾아왔다.
“문학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나요?”장은 어리석은 질문이야말로 유일하게 가치 있는 질문이라고 믿었다. 어리석은 질문에는 답이 없거나 틀린 답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이로써 질문은 질문이 아닌 의지가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동일한 이유로, 나는 그런 질문이 세계를 망쳤다고 생각했는데(그러므로 질문을 가장한 의지는 사라져야 한다고) 장은 그렇기 때문에 그런 질문만이 세계를 구원할 힘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눈먼 부엉이>
소설이 세계에 끼치는 영향은 단편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부조리한 현실을 핍진하게 고발하는 문학이 있고, 소설이라는 예술 장르의 미학적 장치를 더욱 날카롭게 벼려 낯설음을 기반으로 감수성을 뒤바꾸는 문학이 있다.
전자의 영향력은 폭넓고 구체적이지만 그러기 위해 형식이 단순해진다. 반면 후자는 회의감에 가득 차 갈팡질팡하지만, 그만큼 자유롭기도 하다. 하지만 그 두 방향은 역사적으로 서로 얽히고 상호작용하기도 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21세기라는 현재가 그 모든 문학의 성취, 그리고 무엇보다 한계를 절감한 이후의 시대라는 사실이다.
<내가 싸우듯이>는 이러한 21세기에 문학, 또는 혁명의 힘을 믿는 시대착오적인 인물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그 맞은편에서 저들을 의심하고 비웃는 오늘날의 논리, ‘현실감각’ 또한 선연하다. 저 시대착오적인 인물들이 어찌 저렇게 살 수 있었는지 파고드는 소설가 화자조차 저 선조들을 믿지 않거나, 지나간 과거의 믿음이라고 치부할 뿐이다. 하지만 자명한 것은 굳이 말해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특히나 모두가 이미 합의하여 입을 모아 되풀이하고 있는 비난을 다시 하기 위해서라면 말이다.누군가 믿음을 품고 나아갔지만 실패한 길을 다시 되짚어보는 소설가 화자의 의구심은 어느 순간부터 절박함으로 모양을 바꾼다. 내가 살아가는 지금을 구원할 방법은 없을지, 광막한 해변에서 단초를 손끝으로 더듬어나가는 간절함.
그러나 어떤 정답도 발견하지 못한 채 모래들과 함께 조개 껍데기, 담배꽁초, 정체를 알 수 없는 쇳조각들을 들어 올려 가만히 들여다보는 그. 어쩌면 그가 새로운 가능세계를 창조해내는 완전한 허구의 방식이 아니라 역사를 기반으로 떠듬떠듬 나아갔던 것 또한 그 나름의 정직함과 진실됨이 작용한 결과가 아닐까.
문학이 세계를 바꿀 수 있느냐는 질문조차 낯 뜨거운 시대착오로 여겨지는 현재에, <내가 싸우듯이>는 어떤 문학이 우선시되어야 하느냐는 선언보다도 우리가 문학으로 세계를 바꿀 수는 없다는 자조를 대상화하고, 우리가 잃어버린 질문을 지금에 맞게 변용하여 다시 던지고 있었다.내가 이 소설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소설은 <창백한 말>이다. 20세기의 혁명가들, “모든 게 가능해 보이던 시절,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세계에 대해”서만 골몰하며 번듯한 일자리도 없이 주변에 기생해 실패한 시대착오적 사보타주를 해나갈 뿐인 ‘장’. 그는 여자친구 ‘미주’가 있는 러시아로 여행을 가서 자신이 추구하던 이들의 흔적을 찾다가 여러 곤경과 시비에 휘말린다. 러시아와 한국, 21세기를 살아가는 이와 20세기로 떠난 이들 상호 간의 몰이해, 각각의 취향과 꿈의 불화, 여자친구 주변의 남자들과 주고받는 미묘한 긴장감, 속을 갉아먹어 가는 자기혐오와 시대를 향한 분노, 그리고 현대를 당면한 예술의 책무. 좋은 소설이 질문을 남긴다면, 나는 이 소설의 강렬한 결말 앞에서 장이 남긴 유산을 떠맡은 기분이었다. 무언가, 무언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소설이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장은 귀국하면 소설을 쓸 생각이라고 썼다. 일기에는 사빈코프와 세르주, 혁명, 눈, 반동과 구치소, 게페우 등의 단어가 어지럽게 적혀 있었다. 장은 일기의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새하얀 눈밭에 당겨진 불꽃처럼 문장들이 활활 타올랐다.” <창백한 말>
이재현 문학동네 국내문학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