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史 수놓은 여주인공 원톱 카르멘, 그녀는 과연 '팜파탈'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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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강성곤의 아리아 아모레오페라사(史)를 수놓은 빛나는 여주인공들의 이름이 있다. 예컨대 토스카, 질다(리골레토), 비올레타(라 트라비아타), 미미(라 보엠) 등. 그러나 이제 소개할 여인의 존재감에 비하면 모자랄 것이다. 바로 카르멘(Carmen)이다. ‘카르멘’하고 발화(發話)하는 순간, 벌써 뜨겁고 강렬한 그 무엇이 발화(發火)하는 느낌이 들지 않나?
비제 오페라 中 ‘사랑은 길들여지지 않는 새’
200년 전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 세비야. 후끈한 여름날 담배공장 여인들이 광장에 나와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인생의 질곡을 겪은 노처녀와 과부들이 많았다. 가장 아름답고 끼도 많은 카르멘이 노래를 부른다. 아리아 <사랑은 길들여지지 않는 새(L'amour est un Oiseau Rebelle)>.
“사랑은 길들여지는 않는 새/ 아무리 불러도 소용없다오/ 한번 싫다면 그만이야/ 겁줘도 달래도 소용없어/ 나는 말 없는 남자가 좋아/ 사랑은 타고난 보헤미안/ 법도 규칙도 없지/ 만약 날 좋아하지 않는다면 내가 좋아하면 돼/ 그러나 내가 좋아하게 되면 조심해야 할 걸/ 새는 잡았다 싶으면 날아가 버리지/ 새한테는 날개가 있으니까”
1막에 나오는 이 곡이 줄거리와 결말을 암시한다. ‘아바네라Habanera’라는 타이틀로도 간단히 불리는데 곡조가 쿠바산(産) 무곡 풍이라는 뜻이다.카르멘은 함께 모인 군인들 무리 중에서 말 없고 성실하고 순진해 보이는 하사관 돈 호세(Don José)를 점지하곤 꽃 한 송이를 건네며 추파를 던진다. 둘은 사랑했으나 호세보다 더 멋진 투우사 에스카미요(Escamillo)가 나타나고, 카르멘은 자유롭게 그에게 가려 한다. 돈 호세는 변치 않는 사랑을 호소하지만 무시당하자 카르멘을 칼로 찌른다.
조르주 비제(Georges Bizet,1838~1875, 佛)의 최후작이자 최대작이 ‘카르멘’이다. 독일에 바그너, 이탈리아에 베르디가 있다면 프랑스는 비제가 그 위치다. 프랑스인(人) 특유의 감수성⸱화려함⸱신선미⸱생동감이 트레이드 마크다. 그러나 37세에 심장마비로 요절한다. "카르멘은 일단 소재가 너무 부도덕하다"는 비평에 괴로워하던 차, 심장마비가 왔다. 아내 주느비에브와의 결혼 6주년 기념일이었다.카르멘 같은 오페라를 가리켜 ‘오페라 코미크(Opéra-Comique)’라고 한다. 우스운 내용의 오페라가 아니다. 노래와 대사가 물 흐르듯 이어지는, 짜임새가 탄탄한 프랑스 오페라를 가리키는 말이다. 참고로 희가극은 오페라 부파(Opera Buffa)다. 카르멘은 유명 아리아의 보고(寶庫)이기도 하다. 상해 혐의로 손이 묶인 카르멘이 돈 호세에게 풀어달라며 유혹하는 노래 ‘세비야 성벽에 서서’(세기디야, Seguidilla, 스페인 전통 춤곡), 에스카미요가 스스로 뽐내며 부르는 ‘투우사의 노래’, 그리고 돈 호세가 카르멘이 준 꽃을 손에 쥔 채 마지막으로 사랑을 갈구하는 ‘꽃노래’ 등 이외에도 많다.
스페인이 배경이지만 우아한 불어로 노래하는 프랑스 오페라이기에 카르멘은 멋들어진 프랑스어 딕션(Diction,정확성과 유창성을 두루 갖춘 발음⸱발성⸱어조)이 필수다. 플라시도 도밍고(Placido Domingo,1941~ )는 모국어인 스페인어에 영어⸱독어⸱불어⸱이태리어까지 구사하는 데다 특유의 여릿한 이미지까지 있어 돈 호세 역에 제격이었다. 미투 논란으로 요즘은 명성에 금이 간 상태. 불행한 일이다. 카르멘은, 녹음은 누가 뭐래도 마리아 칼라스(1923~1977, 美)이겠지만 실연(實演)은 아무래도 아그네스 발차(Agnes Baltsa,1944~, 그리스)가 탑이리라. 1988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공연은 레전드로 카르멘의 현신(現身)이란 소리를 듣는다.카르멘은 여러모로 유의미한 오페라다. 메조소프라노가 주인공인 게 대표적이다. 대개의 오페라는 소프라노가 히로인이고, 메조는 주인공의 어머니⸱악녀(惡女)⸱친구⸱연적(恋敵) 등이 보통인데 이 공식을 깼다. 모든 메조소프라노의 꿈은 카르멘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또한, 21세기 들어 카르멘은 새로운 평가를 받고 있다. 선량한 남성을 파멸에 이르게 한 팜파탈(Femme Fatale)이 아니라, 당당·떳떳하게 사랑을 선택하며 죽음도 불사하는 여성의 표상으로서 자리매김이다. 지하에서 비제는 아마도 반가워할 것이다.강성곤 음악 칼럼니스트·전 KBS아나운서
[마리아 칼라스의 <사랑은 길들여지지 않는 새 (L'amour est un Oiseau Rebelle)> 녹음]
[아그네스 발차의 <사랑은 길들여지지 않는 새 (L'amour est un Oiseau Rebelle)> 실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