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특색·맥락 따위 없다…선거철마다 바뀌는 공립미술관 정체성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원하되 간섭 않는단 원칙 옛말
지자체장 시정철학 무대로 전락
지속가능한 로드맵 엄두도 못내
‘어글리 공공미술’에 대한 우려는 흉물스러운 공공 조형물에서 그치지 않는다. 전국 각지에 우후죽순 생겨나는 공립미술관 역시 근시안적 운영으로 제자리걸음하며 한국 미술 발전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공립미술관의 정체성이다. 2년 전 국내 첫 미디어아트 중심 미술관을 표방하며 문을 연 울산시립미술관이 대표적이다. 1호 소장품으로 백남준의 미디어아트 작품 ‘거북’을 수집하며 눈길을 끌었지만, 지금은 다소 동력을 잃은 상태다. 새로 취임한 관장이 미디어아트만 고집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면서다. 한 지역 공립미술관장은 “차별화된 콘셉트에 맞춰 작품도 수집해 왔는데 1년 만에 바뀌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고 했다.‘정체성(identity)’은 미술관의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다. 무엇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작품 수집부터 전시 기획, 연구·교육까지 전반적인 운영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회화, 조각, 설치, 미디어아트 등 미술의 영역이 방대한 만큼 정체성은 미술관이 집중하는 가치를 명징하게 드러내는 여과기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이런 이유로 일각에선 울산시립미술관이 미디어아트를 포기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라는 반응도 나온다. 애당초 미디어아트 중심의 미술관을 내세운 게 실책이었다는 지적이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은 “울산 첫 공립미술관에서 왜 미디어아트를 선보여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나 미술사적 맥락이 충분치 않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계획을 잘못 설계한 측면도 있어 보인다”고 했다.

이런 사태가 발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공립미술관이 지방자치단체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한 데 있다고 미술계에서는 보고 있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대원칙이 지역 문화예술 현장에선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지자체장들이 자신의 시정 철학을 선보이기 위한 도구로 공립미술관을 활용하느라 구조적으로 지속가능한 로드맵을 짤 수가 없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실제로 공립미술관장 임명권이 지자체장에게 있다 보니 지방선거를 치르고 나면 지역 미술계는 관장 교체를 놓고 촉각을 곤두세운다.

한 미술계 관계자는 “3~4년마다 사람이 바뀌고 전시 흐름도 싹 달라지니 미술관은 누더기가 된다”며 “지역적 특색을 담거나 미술사적 의미를 발굴하긴커녕 누군가의 ‘치적 쌓기’ 공간으로 전락해 흥행 위주의 천편일률적인 전시만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유승목 기자 moki912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