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줄줄, 위작이 버젓이…국공립 미술관 관리 '엉망진창'

[세계도시는 문화전쟁-100년 문화강국으로 가는 길]
⑪국가의 격 드러내는 국공립 미술관

온·습도 조절 못해 '작품훼손'까지
비만 오면 물 새는 부산시립미술관
누수 8년만에 보수…430억 들어
부산시립미술관 리노베이션 조감도. /부산시립미술관
지역 미술관은 그 도시의 얼굴이다. 이곳에 걸린 작품을 보면 지역 고유의 예술 감수성과 그간 가꿔온 문화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뉴욕, 런던, 파리, 도쿄 같은 세계 주요 도시를 여행할 때면 한 번쯤 도시 이름이 붙은 미술관에 들르는 까닭이다. 이런 점에서 부산은 지금 얼굴 없는 ‘무안(無顔)’한 도시다. 지역 대표 미술관인 부산시립미술관이 올해 미술관을 통째로 뜯어고치는 대공사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 미술관은 2016년부터 비만 오면 건물에서 물이 줄줄 새 작품을 전시하기 힘들었다. 온·습도 조절 기능이 작동하지 않아 작품을 망가뜨리는 일도 있었다. 태풍이 오면 전시실 곳곳에 쓰레기통을 세워 빗물을 받고, 제습기로 물을 빼내야만 했던 부산시립미술관은 작가와 소장가들은 물론 다른 국·공립 미술관 사이에서도 공공연하게 작품 대여 기피 대상으로 통했다.
지난해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무라카미 다카시 전시에 설치된 작품의 모습. /부산시립미술관
지난해 열린 일본의 유명 팝아트 작가 무라카미 다카시 전시엔 “국제적 망신거리”라는 비판이 쏟아지기도 했다. 혈세 20억 원을 들여 전시를 유치하고도, 당초 5개월가량으로 계획했던 전시 기간의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항습 조건을 맞춰 달라는 작가 측 요구를 들어주지 못해 파행을 겪으면서다. 미술계에선 “한국 작가들이 작업은 해외 미술계에서 인정받는 반면 국내 미술 전시·행정 인프라는 부끄러울 정도”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부산과 오사카의 20년은 왜 다를까

한국 제2의 도시 부산을 대표하는 공립미술관인 부산시립미술관은 1998년 개관했다. 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를 대표하는 오사카국제미술관보다 6년 먼저 문을 열었다.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지만, 20여 년이 흐른 현재 두 미술관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부산시립미술관이 노후한 시설 개선을 이유로 430억 원을 들여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에 들어간 것과 달리 오사카국제미술관은 여전히 새것 같은 모습을 유지하며 관람객을 받고 있다. 같은 세월을 보낸 두 미술관의 차이를 만든 결정적 분기점은 무엇일까.

미술계 전문가들은 문화예술 사업을 대하는 ‘철학의 부재’를 꼽는다. 미술관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어떻게 운영돼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 없이 “일단 짓고 보자”는 전시행정이 만연하단 것이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은 “멋진 건물에 그림만 건다고 미술관이 아니다”라며 “손상되기 쉬운 예술작품을 보관하는 장소답게 유지·보수 기능을 당연하게 갖추고 이에 맞는 관리가 이뤄져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항온·항습 기능조차 작동하지 않는 미술관은 애당초 자격 미달이라는 뜻이다.
2020년 부산시립미술관에 폭우로 누수가 발생하자 쓰레기통으로 빗물을 받고 있는 모습. /부산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과 부산시가 보여준 그간의 운영 행태는 졸속에 가까웠다는 게 미술계의 시각이다. 8년 전부터 누수 문제가 지적됐는데도 이에 대한 관리 조치가 미흡했다. 부산시립미술관은 지난해 부산시 감사에서 무자격 업체에 방수 공사를 맡기고, 공사 감독 업무도 소홀히 한 것으로 확인됐다. 부산시가 누수 해결을 위한 시설유지 예산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아 사태를 키웠단 지적도 적지 않다.

이는 곧 미술관을 찾는 시민들의 피해로 이어진다. 실제로 부산시립미술관은 항온·항습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탓에 1970년대 이전의 회화 작품은 다루지 못했다. 작품 손상 우려 때문인데, 이로 인해 부산에서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갔던 이중섭이나 박수근 등 부산시민들이 직접 눈에 담고 싶다고 응답한 근현대 거장들의 작품을 제대로 선보이지 못했다.
일본 오사카 도심부에 위치한 오사카국립국제미술관의 모습. ‘지하형 미술관’으로 눈길을 끄는 이 곳은 일본 최대 규모의 현대미술관으로 8000여 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뒤늦게 430억 원을 들여 ‘미래형 미술관’으로 탈바꿈하겠다는 부산시의 청사진을 두고 미술계에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한 지역 공립미술관 관계자는 “20년 넘은 건물이라 어느 정도 예산을 들여 보수하는 건 당연하지만, 제때 유지보수에 힘썼다면 이런 큰돈을 들여 대공사를 할 필요가 있었겠느냐”라며 “리모델링 비용의 일부를 아껴 작품 구입에 썼다면 세계적인 작품을 소장해 미술관 수준을 끌어올렸을 것”이라고 했다.

겉만 번지르르한 미술관, 속은 텅 비었다

국공립 미술관의 인프라 문제는 비단 하드웨어에서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소장품 관리부터 프로그램 운영 등 소프트웨어적 측면이 더 심각한 경우도 많다. 소장품 관리가 엉망이거나 제대로 된 소장품이 없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 역시 문화예술에 대한 철학 부재가 낳은 결과란 지적이 나온다. 이명옥 관장은 “공립 미술관들이 소장작품 하나 없이 경쟁적으로 건립되기만 하다 보니 콘텐츠는커녕 소장품에 대한 평가와 해석, 학술연구와 정리 등 가치를 재생산해내는 부서나 인력도 없다”며 “결국 전시도 흥미 위주의 천편일률적 전시만 나오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소장품 구입 과정에서도 문제가 벌어지곤 한다. 대구미술관은 지난해 위작 논란으로 발칵 뒤집혔다. 대구시 감사 결과 김진만의 ‘매화’, 서동균의 ‘사군자’ 등 소장작품 일부가 위작으로 판명되면서다. 구입과정에서 진위여부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는 등 절차상 허점으로 벌어진 일이다. 해당 작품 구입에 적게는 한 점당 700만 원에서, 많게는 1500만 원의 예산이 들었단 점에서 혈세를 낭비했단 비판이 제기됐다.

한 공립미술관 학예사는 “소장 작품 구입예산은 오르지 않는데, 국회나 지자체에선 얼마나 많은 작품을 샀는지 정량적인 실적을 따진다”며 “작품 수 채우기에 급급하다 보니 구입이나 기증받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라고 했다.전문가들은 공립미술관이 지역 문화예술 수준을 보여주는 최전선인 만큼, 경직된 운영시스템과 조직 운영을 탈피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프랑스 대표 미술관인 루브르가 정부 지원금을 받으면서도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독립법인 형태로 운영되는 사례를 참고하자는 것이다. 정준모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 대표는 “국민 문화 수준은 높아지는데 공립 미술관에 학예사가 턱없이 모자라는 등 인력과 조직은 과거와 다를 바 없다”며 “보다 전문적인 운영을 위해 법인화 등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지난해 대구시 감사 결과 위작으로 판명된 이복의 '그림 그리는 사람들'. 대구미술관은 이 작품을 포함해 위작 3점을 3200만 원에 구입했다. /대구시 제공
정부의 공립미술관 평가도 강화될 필요가 있다. 현재 문화체육관광부는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에 따라 등록 후 3년이 지난 공립미술관의 설립목적 달성도, 조직·인력·시설 및 재정관리 적정성, 자료 수집 및 관리 충실성, 전시 개최 및 교육 프로그램 실시 실적, 공적책임 등을 평가한다. 기준 점수에 미달한 미술관은 미인증기관이 되지만 별다른 불이익이 없어 유명무실하단 지적도 있다. 문체부 관계자는 “학예사의 경우 미인증 기관 경력이 인정되지 않는 등의 페널티 정도만 있다”면서 “우수 기관에 대한 포상 등 차별화 방안 마련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