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고두현의 아침 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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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고두현
늘 뒤따라오던 길이 나를 앞질러 가기 시작한다.
지나온 길은 직선 아니면 곡선
주저앉아 목 놓고 눈 감아도
이 길 아니면 저 길, 그랬던 길이
어느 날부터 여러 갈래 여러 각도로
내 앞을 질러간다.아침엔 꿈틀대는 리본처럼 푸르게
저녁엔 칭칭대는 붕대처럼 하얗게
들판 지나 사막 지나 두 팔 벌리고
골짜기와 암벽 지나 성긴 돌 틈까지
물가에 비친 나뭇가지 따라 흔들리다가
바다 바깥 먼 항로를 마구 내달리다가
어느 날 낯빛을 바꾸면서 이 길이 맞느냐고
남 얘기하듯, 천연덕스레 내 얼굴을 바라보며
갈래갈래 절레절레
오래된 습관처럼 뒤따라오던 길이 갑자기
앞질러 가기 시작하다 잊은 듯
돌아서서 나에게 길을 묻는 낯선 풍경.-----------------------------------지난주 편지를 읽고 많은 분이 답을 보내주셨습니다. 다정하고 깊이 있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몇 편 더 소개해 달라는 말씀이 많아서 용기를 내어 제 시를 한 번 더 읽어드리겠습니다. 표제작 한 편과 제 삶의 첫 길인 탄생의 순간을 그린 시 한 편을 골랐습니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는 인생이라는 긴 여정의 한 굽이를 돌아 60이 다 되어서 쓴 시입니다. 별다른 설명을 보탤 것도 없이 느낌대로 음미하면 되겠지요. ‘내가 마구간에서 태어났을 때’도 있었던 일 그대로 쓴 거라 덧붙일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그렇잖아도 이번 시집에는 길의 이미지가 많이 담겨 있습니다. 시집 제목부터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이지요. 개인과 사회, 과거와 현재, 지질과 역사의 단면을 길의 이미지로 치환했습니다. 그 길 위에서 만난 사람과 사물, 사회의 이면, 세계의 표정 등을 시로 썼습니다.
길 위의 사람 이야기 중에서도 1부의 ‘맹인 안마사의 슬픔’과 ‘풍란 절벽’ ‘망고 씨의 하루’, 3부의 ‘우득 씨의 열한 시 반’ ‘방호복 화투’ ‘노숙인과 천사’ 등에 슬프고도 애틋한 삶의 풍경들이 스며 있습니다.
과거의 길과 현재의 길이 맞닿은 곳에서 ‘새로운 길’의 시작점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즐겨 활용한 것이 ‘인유(引喩)의 작시법’입니다. 만해와 백석, 정지용, 윤동주, 정병욱 등의 입과 눈빛을 빌려 다음 세대의 여정을 그려보는 작업에 공을 들였습니다.그 연장선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과 ‘경전 필사’ 연작을 만날 수 있었으니, 이번 시집을 관통하는 이야기의 방향은 ‘오래된 길’에서 ‘새로운 길’ 쪽으로 가 닿습니다. 그 길의 접점에서 태어난 ‘신생의 말’이 곧 63편의 신작 시이지요.
내가 마구간에서 태어났을 때
생의 첫 장면은 종종
믿을 수 없는 순간 펼쳐진다.
보리 흉년 젖배 곯던
명절 코앞 신새벽
하필이면 주인집 만삭
같은 용마루 아래
두 산모 해산 못 해
안채서 먼 마구간
소가 김을 뿜을 때마다
하얗게 빛나던 짚풀더미와
쇠스랑의 뿔
송아지 옹알이하며
구유 곁에 희부윰
드러눕고
그 짧은 부싯돌로
문틈 비추며 기웃
들여다보던 달빛.
제가 태어나던 해, 보리 흉년이 들어서 모두가 먹고살기 어려웠습니다. 그 와중에 한 지붕 아래 두 산모가 아이를 낳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지요. 오랜 풍습에 따르면 한 용마루 아래 두 산모가 해산할 수 없다 해서, 셋방살이 신세였던 우리 어머니는 안채에서 먼 소마구간에 짚풀더미를 깔고 저를 낳았답니다. 그땐 그런 일이 더러 있었다고 하더군요.
이 시에 대해 신달자 시인은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원하는 것을 생각하고 그것이 마음에 가득 차게 되면 그 사람의 인생에 나타나는 일이다. 고두현 시인의 시에는 원하는 것이 가득 차고 드디어 시로 나타나는 이야기들이 많다. 마구간에서 태어난 시인의 출생도 시적이다. 오죽 궁금하면 달빛이 슬며시 들여다보았겠는가.
마구간에서 시인으로 변모해 온 것은 아마도 달빛의 기도가 아닌가 생각된다. 태어난 곳이 따뜻한 방이 아니라 잡풀 더미와 쇠스랑 뿔이 있는 곳이었다. 도전적이고 화를 잘 내는 성격일 수 있는 이 대목을 달빛이 화해를 시켜 부드러운 시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이 된다. 마구간 출신으로 예수님 말고 고두현 시인이 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장인수 시인도 이 시에 대한 언급을 페이스북에 올리셨군요.
“고두현 시인은 마구간의 송아지 옆 짚풀더미에서 태어났다. 쇠스랑 옆에서 태어났다. 화자가 어릴 적에 아버지는 북간도로 떠났다가 피폐한 몸과 궁핍한 신세로 고향에 돌아와 얼마 후 돌아가시고, 화자는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십 년 넘게 남해 금산 보리암에서 동자승으로 지내고, 어머니는 공양주 보살로 지내다가 머리 깎고 아예 비구니가 되셨고…. 그렇게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소년 고두현. 지금은 성경을 필사하고 있는 시인 고두현.
그래서인지 그의 시는 마치 씨앗이 꽃과 잎, 가지와 열매를 거쳐 다시 땅속으로 돌아가듯이 거듭되는 생명체들의 비밀스런 생과 사의 순환고리를 끊임없이 환기하고, 깊이 들여다보듯이 시를 쓴다. 고두현 시인의 시집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에 나오는 수많은 시어들은 마치 종교적인 성물(聖物)과 성화(聖畵)에 가깝다. 그가 살아온 내력이 직방으로 종교적인 속살이었듯이 그의 시집 속에 나오는 장소, 물건, 서민들의 생활 공간이 모두 신전이나 성전 같다.”오늘, 시 두 편에 얽힌 이야기를 짧게나마 공유해 봤습니다. 앞으로도 가끔 제 시에 담긴 사연들을 들려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요즘 날씨가 완연한 봄을 넘어 초여름으로 넘어간 듯합니다. 새잎 푸르듯 청양한 날들 즐기시길 빕니다.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등 출간. 유심작품상, 김만중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늘 뒤따라오던 길이 나를 앞질러 가기 시작한다.
지나온 길은 직선 아니면 곡선
주저앉아 목 놓고 눈 감아도
이 길 아니면 저 길, 그랬던 길이
어느 날부터 여러 갈래 여러 각도로
내 앞을 질러간다.아침엔 꿈틀대는 리본처럼 푸르게
저녁엔 칭칭대는 붕대처럼 하얗게
들판 지나 사막 지나 두 팔 벌리고
골짜기와 암벽 지나 성긴 돌 틈까지
물가에 비친 나뭇가지 따라 흔들리다가
바다 바깥 먼 항로를 마구 내달리다가
어느 날 낯빛을 바꾸면서 이 길이 맞느냐고
남 얘기하듯, 천연덕스레 내 얼굴을 바라보며
갈래갈래 절레절레
오래된 습관처럼 뒤따라오던 길이 갑자기
앞질러 가기 시작하다 잊은 듯
돌아서서 나에게 길을 묻는 낯선 풍경.-----------------------------------지난주 편지를 읽고 많은 분이 답을 보내주셨습니다. 다정하고 깊이 있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몇 편 더 소개해 달라는 말씀이 많아서 용기를 내어 제 시를 한 번 더 읽어드리겠습니다. 표제작 한 편과 제 삶의 첫 길인 탄생의 순간을 그린 시 한 편을 골랐습니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는 인생이라는 긴 여정의 한 굽이를 돌아 60이 다 되어서 쓴 시입니다. 별다른 설명을 보탤 것도 없이 느낌대로 음미하면 되겠지요. ‘내가 마구간에서 태어났을 때’도 있었던 일 그대로 쓴 거라 덧붙일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그렇잖아도 이번 시집에는 길의 이미지가 많이 담겨 있습니다. 시집 제목부터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이지요. 개인과 사회, 과거와 현재, 지질과 역사의 단면을 길의 이미지로 치환했습니다. 그 길 위에서 만난 사람과 사물, 사회의 이면, 세계의 표정 등을 시로 썼습니다.
길 위의 사람 이야기 중에서도 1부의 ‘맹인 안마사의 슬픔’과 ‘풍란 절벽’ ‘망고 씨의 하루’, 3부의 ‘우득 씨의 열한 시 반’ ‘방호복 화투’ ‘노숙인과 천사’ 등에 슬프고도 애틋한 삶의 풍경들이 스며 있습니다.
과거의 길과 현재의 길이 맞닿은 곳에서 ‘새로운 길’의 시작점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즐겨 활용한 것이 ‘인유(引喩)의 작시법’입니다. 만해와 백석, 정지용, 윤동주, 정병욱 등의 입과 눈빛을 빌려 다음 세대의 여정을 그려보는 작업에 공을 들였습니다.그 연장선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과 ‘경전 필사’ 연작을 만날 수 있었으니, 이번 시집을 관통하는 이야기의 방향은 ‘오래된 길’에서 ‘새로운 길’ 쪽으로 가 닿습니다. 그 길의 접점에서 태어난 ‘신생의 말’이 곧 63편의 신작 시이지요.
내가 마구간에서 태어났을 때
생의 첫 장면은 종종
믿을 수 없는 순간 펼쳐진다.
보리 흉년 젖배 곯던
명절 코앞 신새벽
하필이면 주인집 만삭
같은 용마루 아래
두 산모 해산 못 해
안채서 먼 마구간
소가 김을 뿜을 때마다
하얗게 빛나던 짚풀더미와
쇠스랑의 뿔
송아지 옹알이하며
구유 곁에 희부윰
드러눕고
그 짧은 부싯돌로
문틈 비추며 기웃
들여다보던 달빛.
제가 태어나던 해, 보리 흉년이 들어서 모두가 먹고살기 어려웠습니다. 그 와중에 한 지붕 아래 두 산모가 아이를 낳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지요. 오랜 풍습에 따르면 한 용마루 아래 두 산모가 해산할 수 없다 해서, 셋방살이 신세였던 우리 어머니는 안채에서 먼 소마구간에 짚풀더미를 깔고 저를 낳았답니다. 그땐 그런 일이 더러 있었다고 하더군요.
이 시에 대해 신달자 시인은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원하는 것을 생각하고 그것이 마음에 가득 차게 되면 그 사람의 인생에 나타나는 일이다. 고두현 시인의 시에는 원하는 것이 가득 차고 드디어 시로 나타나는 이야기들이 많다. 마구간에서 태어난 시인의 출생도 시적이다. 오죽 궁금하면 달빛이 슬며시 들여다보았겠는가.
마구간에서 시인으로 변모해 온 것은 아마도 달빛의 기도가 아닌가 생각된다. 태어난 곳이 따뜻한 방이 아니라 잡풀 더미와 쇠스랑 뿔이 있는 곳이었다. 도전적이고 화를 잘 내는 성격일 수 있는 이 대목을 달빛이 화해를 시켜 부드러운 시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이 된다. 마구간 출신으로 예수님 말고 고두현 시인이 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장인수 시인도 이 시에 대한 언급을 페이스북에 올리셨군요.
“고두현 시인은 마구간의 송아지 옆 짚풀더미에서 태어났다. 쇠스랑 옆에서 태어났다. 화자가 어릴 적에 아버지는 북간도로 떠났다가 피폐한 몸과 궁핍한 신세로 고향에 돌아와 얼마 후 돌아가시고, 화자는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십 년 넘게 남해 금산 보리암에서 동자승으로 지내고, 어머니는 공양주 보살로 지내다가 머리 깎고 아예 비구니가 되셨고…. 그렇게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소년 고두현. 지금은 성경을 필사하고 있는 시인 고두현.
그래서인지 그의 시는 마치 씨앗이 꽃과 잎, 가지와 열매를 거쳐 다시 땅속으로 돌아가듯이 거듭되는 생명체들의 비밀스런 생과 사의 순환고리를 끊임없이 환기하고, 깊이 들여다보듯이 시를 쓴다. 고두현 시인의 시집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에 나오는 수많은 시어들은 마치 종교적인 성물(聖物)과 성화(聖畵)에 가깝다. 그가 살아온 내력이 직방으로 종교적인 속살이었듯이 그의 시집 속에 나오는 장소, 물건, 서민들의 생활 공간이 모두 신전이나 성전 같다.”오늘, 시 두 편에 얽힌 이야기를 짧게나마 공유해 봤습니다. 앞으로도 가끔 제 시에 담긴 사연들을 들려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요즘 날씨가 완연한 봄을 넘어 초여름으로 넘어간 듯합니다. 새잎 푸르듯 청양한 날들 즐기시길 빕니다.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등 출간. 유심작품상, 김만중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