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공립미술관 '韓얼굴'인데…위작 전시에 천장선 물 뚝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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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문화강국으로 가는 길지역 미술관은 그 도시의 얼굴이다. 이곳에 걸린 작품을 보면 지역 고유의 예술 감수성과 그간 가꿔온 문화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뉴욕, 런던, 파리, 도쿄 같은 세계 주요 도시를 여행할 때면 한 번쯤 도시 이름이 붙은 미술관에 들르는 까닭이다. 이런 점에서 부산은 지금 얼굴 없는 ‘무안(無顔)’한 도시다. 지역 대표 미술관인 부산시립미술관이 올해 미술관을 통째로 뜯어고치는 대공사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 미술관은 2016년부터 비만 오면 건물에서 물이 줄줄 새 작품을 전시하기 힘들었다. 온·습도 조절 기능이 작동하지 않아 작품을 망가뜨리는 일도 있었다. 태풍이 오면 전시실 곳곳에 쓰레기통을 세워 빗물을 받고, 제습기로 물을 빼내야만 했던 부산시립미술관은 작가와 소장가들은 물론 다른 국공립 미술관 사이에서도 공공연하게 작품 대여 기피 대상으로 통했다.
(11) '국가의 격' 드러내는 미술관·공연장 부끄러운 운영 실태
온·습도 조절 못해 '전시 취소'
비만 오면 물 새는 부산시립미술관
20억 들인 '다카시 팝아트展' 철수
감정절차 허술 '위작 매입'
'매화' '사군자' 짝퉁 산 대구미술관
1점당 700만~1500만원 혈세 낭비
국내 공연장 497개 노후화
"클래식 제대로 즐길 곳 손에 꼽혀"
48년 만에 세종문화회관 보수로
2026년부터 강북 오케스트라홀 0
지난해 열린 일본의 유명 팝아트 작가 무라카미 다카시 전시엔 “국제적 망신거리”라는 비판이 쏟아지기도 했다. 혈세 20억원을 들여 전시를 유치하고도 당초 5개월가량으로 계획했던 전시 기간의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항습 조건을 맞춰 달라는 작가 측 요구를 들어주지 못해 파행을 겪으면서다. 미술계에서 “한국 작가들의 작업은 해외 미술계에서 인정받는 반면 국내 미술 전시·행정 인프라는 부끄러울 정도”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부산과 오사카의 20년은 왜 다를까
한국 제2의 도시 부산을 대표하는 공립미술관인 부산시립미술관은 1998년 개관했다. 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를 대표하는 오사카국제미술관보다 6년 먼저 문을 열었다.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지만, 20여 년이 흐른 현재 두 미술관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부산시립미술관이 노후한 시설 개선을 이유로 430억원을 들여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에 들어간 것과 달리 오사카국제미술관은 여전히 새것 같은 모습을 유지하며 관람객을 받고 있다. 같은 세월을 보낸 두 미술관의 차이를 만든 결정적 분기점은 무엇일까.미술계 전문가들은 문화예술 사업을 대하는 ‘철학의 부재’를 꼽는다. 미술관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어떻게 운영돼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 없이 “일단 짓고 보자”는 전시행정이 만연하다는 것이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은 “멋진 건물에 그림만 건다고 미술관이 아니다”며 “손상되기 쉬운 예술 작품을 보관하는 장소답게 유지·보수 기능을 당연하게 갖추고 이에 맞는 관리가 이뤄져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부산시립미술관과 부산시가 보여준 그간의 운영 행태는 졸속에 가까웠다는 게 미술계의 시각이다. 8년 전부터 누수 문제가 지적됐는데도 이에 대한 관리 조치가 미흡했다. 부산시립미술관은 지난해 부산시 감사에서 무자격 업체에 방수 공사를 맡기고, 공사 감독 업무도 소홀히 한 것으로 확인됐다. 부산시가 누수 해결을 위한 시설유지 예산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아 사태를 키웠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이는 곧 미술관을 찾는 시민들의 피해로 이어졌다. 부산시립미술관은 항온·항습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탓에 1970년대 이전의 회화 작품은 다루지 못했다. 작품 손상 우려 때문인데, 이로 인해 부산에서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갔던 이중섭 박수근 등 부산시민들이 직접 눈에 담고 싶다고 응답한 근현대 거장들의 작품을 제대로 선보이지 못했다.
겉만 번지르르한 미술관, 속은 텅
국공립 미술관의 인프라 문제는 비단 하드웨어에서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소장품 관리부터 프로그램 운영 등 소프트웨어적 측면이 더 심각한 경우도 많다. 소장품 관리가 엉망이거나 제대로 된 소장품이 없는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이 역시 문화예술에 대한 철학 부재가 낳은 결과란 지적이 나온다. 이명옥 관장은 “공립 미술관들이 소장 작품 하나 없이 경쟁적으로 건립되기만 하다 보니 콘텐츠는커녕 소장품에 대한 평가와 해석, 학술연구와 정리 등 가치를 재생산해내는 부서나 인력도 없다”며 “장기적인 관점에서 미술관 발전을 위한 전략을 수립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사정이 이렇다 보니 소장품 구입 과정에서도 문제가 발생하곤 한다. 대구미술관은 지난해 위작 논란으로 발칵 뒤집혔다. 대구시 감사 결과 김진만의 ‘매화’, 서동균의 ‘사군자’ 등 소장 작품 일부가 위작으로 판명되면서다. 구입 과정에서 진위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는 등 절차상 허점으로 벌어진 일이다. 해당 작품 구입에 적게는 한 점당 700만원에서, 많게는 1500만원의 예산이 들었다는 점에서 혈세를 낭비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한 공립미술관 학예사는 “소장 작품 구입 예산은 오르지 않는데, 국회와 지방자치단체에선 얼마나 많은 작품을 샀는지 정량적인 실적을 따진다”며 “작품 수 채우기에 급급하다 보니 구입하거나 기증받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라고 했다.전문가들은 공립미술관이 지역 문화예술 수준을 보여주는 최전선인 만큼 경직된 운영시스템과 조직 운영을 탈피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프랑스 대표 미술관인 루브르가 정부 지원금을 받으면서도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독립법인 형태로 운영되는 사례를 참고하자는 것이다. 정준모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 대표는 “국민 문화 수준은 높아지는데 공립미술관에 학예사가 턱없이 모자라는 등 인력과 조직은 과거와 다를 바 없다”며 “보다 전문적인 운영을 위해 법인화 등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열악한 인프라는 국공립 미술관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클래식 공연장 부족 또한 국내 문화예술계의 고질적인 문제로 꼽혀왔다. 서울에서는 특히 강남권 인프라 쏠림 현상이 문제로 지적돼 왔다. 예술의전당, 롯데콘서트홀 모두 강남권에 있고, 강북에는 클래식 전용 홀이 한 곳도 없는 상황. 뒤늦게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을 48년 만에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한다고 하지만, 음악계에서는 “이미 너무 늦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여의도에 설립될 ‘제2의 세종문화회관’ 또한 목표 착공 시기가 2026년인 만큼 당분간 강남권 주민을 제외하면 클래식 공연장에 접근하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전국 곳곳에 있는 공연장들이 리모델링에 나서면서 연주자들이 설 곳 또한 마땅치 않다는 얘기가 나온다. 국내 굴지의 공연장인 서울 예술의전당도 지난해 30년 만에 콘서트홀 바닥을 비롯해 백스테이지, 대기실 바닥 공사 리모델링 공사를 마무리했다.
문화체육관광부 등록 공연장 현황에 따르면 2022년 기준 1337개의 공연장 중 497여 개가 2010년 이전에 지어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방에는 클래식 전용 공연장은 고사하고 일반 공연장조차 시설 노후로 낡아가고 있다. 경남 창원의 대표 공연장으로 꼽히는 성산아트홀은 2000년대부터 리모델링 이야기가 나왔지만, 20여 년 만에 사전검토 절차를 진행 중이다.클래식 공연은 전용 홀이 아닌 다목적홀에서 연주할 경우 고유의 음향을 제대로 내지 못한다. 업계에서 “클래식 음악을 제대로 들을 만한 공연장은 예술의전당, 롯데, 부천아트센터, 통영국제음악당 등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유승목/최다은 기자 moki912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