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비통이 왜 이런 도박을…" 패션계 발칵 뒤집힌 까닭 [안혜원의 명품의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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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원의 명품의세계] 41회명품 브랜드들이 줄줄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Creative Director)를 교체했다. CD는 브랜드의 콘셉트와 디자인을 총괄하는 일종의 ‘총감독’이다. 상품 기획부터 디자인, 광고 홍보 등 패션 브랜드의 비주얼과 관련된 모든 것을 총괄하는 역할. 제품을 디자인하는 수석디자이너와 달리 감성을 상품화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잦아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이동
구찌 CD는 발렌티노로
루이비통은 유명 가수 영입
업계에 따르면 글로벌 명품 브랜드들은 작년 한 해에만 CD를 30명 넘게 갈아 치웠다. 앤 드뮐미스터, 트루사르디, 발리 등은 3시즌도 채 넘기지 않고 CD를 교체했다. 이 같은 잦은 변동은 최근 명품 브랜드의 위기의식을 보여주는 방증이라 할 만하다.경기 둔화로 명품 판매가 급감하면서 단기간에 성과를 내지 못하면 오래 기다리지 않고 패션 수장을 해고하고 새로 고용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는 얘기다. 일각에선 잦은 변화가 브랜드 신뢰도를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하지만 명품 소비가 확 꺾인 마당에 새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해선 '과감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게 명품 브랜드들의 셈법이다.
'인간 구찌' 미켈레, 같은 그룹사 내 발렌티노 수장으로
이달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 발렌티노에 새로운 CD가 온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패션업계 전체가 술렁였다. 2022년 돌연 구찌를 떠나 패션피플들의 아쉬움을 자아낸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발렌티노 CD로 돌아왔기 때문이다.미켈레는 프랑스 명품업체 케링그룹의 대표 브랜드 구찌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당대 대표적인 스타 디자이너 중 하나다. 이번에 발렌티노에 영입되면서 약 1년6개월 만에 다시 케링그룹과 인연을 맺게 됐다. 미켈레를 다시 불러들인 건 그가 발렌티노에서 구찌의 영광을 재현해주길 바라는 케링그룹의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미켈레는 2015년 구찌의 CD로 전격 발탁됐다. 그가 선보인 파격적인 보헤미안풍 맥시멀리즘 스타일이 대중적으로 큰 호응을 얻으며 구찌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디오니소스백, 재키1961백 등이 미켈레 시대를 대표하는 제품들이다. 2014년 35억 유로(약 5조846억원)였던 구찌 연간 매출액은 그가 부임한 이후 97억3000 유로(약 14조1352억원)로 3배 가까이 늘었다. 종전까지 무명에 가까웠던 그 역시 일약 스타 디자이너 반열에 올랐으며 구찌 CD로 있던 9년 동안 매년 새로운 패션을 선보이며 트렌드를 선도했다.
미켈레를 떠나 보낸 구찌는 유명 디자이너 대신 신예를 발탁했다. 30대 무명 디자이너인 사바토 데 사르노가 그 주인공이었다. 사르노는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으로 2005년 프라다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돌체앤가바나를 거쳐 2009년 발렌티노에서 패션 디렉터로 재직 중이었다. 그는 지난해 말 구찌 ‘2024 봄 여름 컬렉션’을 런웨이에 올리며 데뷔전을 치렀다. 이 런웨이가 앞으로의 구찌의 지향점을 잘 드러냈다는 게 업계 평가였다. 사르노는 기존 구찌와는 180도 다른 디자인을 선보였다. 전면에 내세운 건 ‘스텔스 럭셔리’로 조용한 명품을 강조했다. 최근 패션계를 관통하는 유행으로 상표를 숨기는 디자인이다. 에르메스, 로로피아나 등 하이엔드 브랜드로 꼽히는 명품들이 주로 추구하는 스타일이다.
사르노는 지금까지 구찌 하면 떠올랐던 현란한 색감, 대문짝만한 로고 장식 등을 과감하게 버렸다. 가방, 옷, 신발 등 대부분 제품에서 로고를 최소화한 디자인을 선보였다. 원색을 사랑했던 미켈레와 반대로 버건디와 베이지 등 탁하고 차분한 색을 내세웠다.
루이비통 남성복 CD는 가수 퍼렐 윌리엄스
루이비통은 '도박'에 가까운 선택을 했다. 지난해 초 영입한 CD는 놀랍게도 가수 퍼렐 윌리엄스였다. 퍼렐은 '해피'라는 노래로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가수다. 옷 잘입고 좋아하기로 유명하던 대중 스타였던 그가 루이비통 남성복 CD로 발탁됐다는 소식은 패션계를 뒤집어 놓았다. 퍼렐은 이미 샤넬과 협업하며 화제가 된 바 있다. 남성복을 만들지 않는 샤넬이 퍼렐과 협업하며 남녀 공용 의상을 내놓았으며 후드 티셔츠 하나에 수백 만원을 호가해도 시중에 내놓기도 전에 예약 판매로 매진되기도 했다.다만 해외 패션지들은 패션 칼럼니스트나 해외 유명 편집샵 컬렉터의 입을 빌어 “팔로워 수가 높고 화제가 되면 디자인의 기본을 배우지 않아도 디자이너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직업적 뿌리부터 흔들릴 수 있다”는 취지의 우려도 제기했다.
하지만 퍼렐 선임이 큰 화제를 일으키며 대중에게 루이비통을 강하게 각인시킨 것만은 사실. 루이비통의 주가는 윌리엄스 선임 발표 당일 2.6%나 상승했다. 첫 콜렉션도 관심도 면에서는 대히트를 쳤다. 지난해 6월 패션쇼를 공개하자마자 한 달도 채 안돼 각종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관련 게시물이 4만2000개, 리트윗은 120만개 이상을 기록했다.
킴 카다시안, 리한나, 루이스 해밀턴 등이 참석한 이 런웨이는 기존 루이비통 패션하우스를 퍼렐만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콘셉트가 두드러졌다는 평가다.이밖에 끌로에도 1981년생 세메나 카말리를 영입했다. 그는 생로랑 여성복 디자인 디렉터로 활동한 바 있다. 톰포드 역시 무명 디자이너 피터 호킹스를 택했다. 1998년 구찌에 입사해 디자이너 톰 포드 아래에서 패션을 배운 사내 직원이다. 루도빅 생 제르넹을 한 시즌 만에 갈아치운 앤 드뮐미스터는 2020년부터 일하던 젊은 디자이너 스테파노 갈리치를 선택했다.
안혜원 한경닷컴 기자 an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