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는 마침내 구속되지 않고 우정을 쌓는 법을 깨달았다

[arte] 김동훈의 고흐로 읽는 심리수업
페르 탕기와 ‘사회적 교환 이론’
반 고흐 「페르 탕기의 초상화」 (왼쪽부터 1887년, 1887년, 1888년)
파리에서 그림을 그리는 동안 고흐는 물감 및 그림 도구를 파는 줄리앙 프랑수아 탕기(Julien-François Tanguy)와 친분을 맺었다. 그와의 만남을 계기로 고흐의 화풍도 바뀐다. 고흐가 그린 '페르 탕기의 초상화' 세 점에서 그 변화를 볼 수 있다. 인상파 양식을 따르는 첫 작품에 비해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원색의 배합과 단순화된 형태가 강렬함을 더한다.


"학문적 공식의 훌륭한 파괴자"

반 고흐 「페르 탕기의 초상화」 (1887년)
첫 번째 초상화의 탕기는 물감 가게의 앞치마를 걸친 소박한 노인이다. 고흐가 파리에 오기 전에 사용했던 흙색이 도드라진다. 아마도 그에게서 받은 첫인상인 듯싶다. 그런데 두 번째 그림에서 탕기는 두 손을 모아 배에 얹고 느긋하게 미소를 머금고 있다. 입체감 없는 평평한 면에 빨강, 노랑, 파랑 빛이 감돌아 경쾌하다. 배경에는 선명한 일본 판화들이 빽빽하다. 이 초상화를 두고 미술사학자들의 논의가 많이 있었다. 일부는 부처를 상징한다며 동양의 현자로 해석하기도 했다.
반 고흐 「페르 탕기의 초상화」 (1887년)
고흐의 잠재성을 높이 평가했던 탕기는 이 그림을 유독 아꼈다. 그가 숨을 거둔 1894년 조각가인 오귀스트 로댕(August Rodin)은 이 초상화를 유족에게서 기필코 구입했다. 그러곤 그때까지 아직 인기 없었던 작가에게 감동 어린 고백을 했다. “고흐는 학문적 공식의 훌륭한 파괴자이자 빛에 대한 천재성을 지녔다.”


'사회적 교환' 심리

페르 탕기는 이 초상화에 어떤 영향력을 끼친 것일까? 흥미롭게도 탕기에 대한 작가들의 기록에 한결같이 등장하는 내용은, 노인이 물감을 비롯한 그림 도구들을 판매할 때 늘 ‘교환’의 대가를 요구했다는 점이다. 친한 화가가 무일푼일 때는 공짜로 줄 만도 한데 ‘현자’로 묘사된 인물치고는 인심이 참 야박하다. 하지만 탕기의 이런 행동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터득한 삶의 지혜였다.관계 심리 이론 중에 ‘사회적 교환 이론(Social Exchange Theory)’이 있다. 미국의 사회학자 조지 호먼과 리처드 에머슨 등에 의해 1950년대에 발표된 이후 사회학과 경영학에서 이윤, 비용, 균형, 공정성 등의 개념으로 넓게 활용되고 있다. 인간은 관계를 맺을 때 물질을 비롯한 감정, 명예, 능력 등을 상대와 공정하게 교환할 것을 예상하고 행동하는 심리를 가진다. 미국 심리학자 레다 코스미데스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인지구조 자체가 상호 교환을 토대로 틀지어져 있다. 사람과의 관계가 갑자기 틀어지는 주된 이유는 인지구조가 불공정한 교환을 포착했기 때문이라 한다.

고흐는 탕기의 두 번째 초상화를 완성하기 전에 테오와의 사이에 문제가 있었다. 고흐는 그동안 동정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퍼주었던 반면 가족처럼 가까운 사람에게는 부담이 될 정도로 손을 벌렸다. 고흐는 파리에서 동생 테오의 집에 얹혀살면서 그게 아무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했다. 첫해에는 다행히도 테오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신진 화가들을 발굴하는 데 기여했다. 테오에게 그동안 빚진 것을 갚은 것 같아 홀가분했다. 그 결과가 기대 이상이었다. 일부 화가들이 유명세를 얻으면서 동생은 큰 수익을 냈을뿐만 아니라 전시기획가로서의 명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흐에게는 어떤 보상도 없었다. 고흐는 이때 깊은 상처를 입고 스스로 신진 화가들의 전시회를 기획했다. 그러나 테오의 냉소적인 반응 속에서 결국 동생의 화랑도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바로 그때 고흐는 페르 탕기의 지혜를 다시 보게 되었다. 고흐가 탕기를 구태여 현자로 상징한 것은 물감을 인심 좋게 공급하는 호인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정당한 대가로 구입한 도구들을 통해 고흐가 하고 싶은 이상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정하게 교환할 때 빚지거나 밑진 감정이 들지 않으며, 부채감 내지 손실감의 늪에서 빠져나와야 자신의 능력을 당당하게 펼칠 수 있음을 깨달았다. 탕기와 철저한 ‘사회적 교환’을 실천하며 그동안의 인간관계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야 놀랍게도 테오와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

'사회적 교환'으로 발휘되는 잠재력

페르 탕기는 잠재력을 가진 신진 화가들에게 자신의 가게를 개방했다. 그곳에는 세잔, 피사로, 고갱, 모네, 마네 등이 들락거렸다. 벽에는 이들의 작품도 있었는데 탕기가 어김없이 물건값 대신 받아놓은 것들이었다. 만약 그들에게 공짜로 그림 도구를 주거나 혜택을 베풀었다면 젊은 사람들이 어른의 눈치를 볼 것은 뻔한 일, 역량을 펼치려면 그들을 홀가분하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뭔가 갚아야 한다는 부채감이 혹여 앞길이 창창한 청년들의 잠재력을 막을까 해서 탕기는 이들에게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를 심어주고 싶었다. 탕기식 ‘사회적 교환’은 젊은이의 잠재력을 일깨웠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이후 대부분 훌륭한 화가가 되었다.
에밀 베르나르 「자화상」 (1897년)
고흐가 이런 태도를 취했을 무렵 탕기로부터 젊은 비평가 한 명을 소개받았다. 고흐보다 열다섯 살이나 어린 에밀 베르나르. 그는 어릴 때는 인상파에 속했지만 후에 상징주의로 전향한 인물이었다. 눈치를 보거나 입바른 소리를 절대 하지 않았다. 심지어 선배였던 모네와 쇠라의 인상주의 그림을 ‘무대효과’라고 거침없이 말하곤 했다. 당당함과 통찰력을 겸비한 이 청년은 고흐의 잠재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고흐는 베르나르의 철학적 소양에 대해 항상 매료되었다. 젊은 비평가의 소신은 이랬다. 모든 예술의 밑바탕에는 삶의 본질이 있으며 그 본질을 표현하는 것이 미술의 임무다. 인상파는 눈에 보이는 자연만을 강조함으로써 삶의 본질을 가둬 버렸고 그 본질을 아예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었다. 미술은 단순한 모방과 재현을 넘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을 표현하며 관람자들을 사유하도록 해야 한다……. 베르나르는 평평한 면과 굵은 윤곽선으로 화면 구성을 단순화하여 그림을 완성했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인상파의 양식을 거부하는 행위였다. 고흐가 그린 '페르 탕기의 초상화'가 인상파의 화풍에서 바뀐 이유는 분명히 베르나르의 영향이다.
반 고흐 「페르 탕기의 초상화」 (1888년)

친구 사이에 교환한 판화의 세계

페르 탕기를 현자로 표현한 초상화의 후경에는 원색 판화들이 놓여 있다. 고흐가 판화에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은 이미 5년 전 연인 시엔을 주제로 한 판화 '슬픔'을 만든 것이나 '감자를 먹는 사람들'을 주제로 그림뿐만 아니라 판화를 제작한 점에서 잘 드러난다. 또한 엔트워프 왕립미술학교에 잠시 머물 동안에도 다수의 판화들로 숙소를 장식했었다. 파리에서는 테오를 통해 수백 종의 판화를 구매하도록 했다. 파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고흐는 판화에 대한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베르나르를 만나기 전까지 자신이 그토록 판화에 끌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반 고흐 「슬픔」 (석판화, 1882년경)
고흐는 베르나르와 함께 판화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자신이 관찰한 판화들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고 베르나르는 그 판화들이 지니는 상징적 의미를 해석했다. 이들의 대화는 예상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의미 있는 것이었다. 요약하자면 대충 이렇다.

▶판화는 간결한 선, 강렬한 색, 양식화된 도상으로 구성되었다.
▶판화는 이미지를 통해 순수한 감각을 표현할 수 있다.
▶판화는 고대 이집트, 중세 유럽, 아프리카 부족, 태평양 문명 등에 그 이미지가 보존되었다.
▶판화는 원시성을 통해 임시적이고 가식적인 문명의 껍질을 벗긴다.
▶판화는 삶의 본질을 드러낸다.

고흐는 자신이 판화에 매혹된 이유가 삶의 본질을 발견하려는 갈망이었음을 깨달았다. 비로소 판화를 자기 그림의 교훈으로 삼았다. 베르나르는 이렇게 바뀐 고흐의 화풍에 대해서 말했다. “고흐는 모든 이론을 부정하고 완성이나 조화를 위한 온갖 노력을 부인했다. 오로지 강렬한 삶의 본질을 포착하려는 노력으로 그림을 지독히 괴롭혔다.”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석판화, 1885년경)
가족이나 종교, 미술계와의 단절로 지독한 고독을 겪었던 고흐는 페르 탕기로부터 ‘사회적 교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배운 후에야 베르나르와의 소중한 우정을 쌓았다. 탕기는 고흐에게 동정 어린 공짜 물감이 아니라 바른 인간관계를 선사했다. 고흐는 자신보다 훨씬 어린 베르나르를 통해 성장했고 잠재력 가득한 베르나르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베르나르는 고흐와 가까워진 이후 줄곧 편지를 교환했는데, 편지의 양으로 보자면 동생 테오 다음으로 가장 많은 편지를 남겼다. 고흐가 파리를 떠난 후 고갱과의 다툼에서 귀를 잃었을 때에도, 그리고 2년 반 만에 죽었을 때에도, 베르나르는 고흐와 나눈 편지들을 출간했고 고흐의 장례식을 작품으로 남겼고 고흐의 전시회를 기획했다. 고흐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서 고흐를 세상에 알리는 데 앞장섰다.
에밀 베르나르와 고흐 (1886년)
공정한 ‘사회적 교환’이 없는 우정은 어느 한쪽이 희생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상은 고흐와 테오에게서 그러했듯 결국 한쪽이 그 관계를 포기하게 만든다.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없기에 그 관계가 더 이상 유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고흐와 테오가 서로 공정한 교환을 계속했다면 우리는 파리를 배경으로 한 고흐의 작품들을 더 많이 볼 수 있었을 것이다.우리에게는 어떤 우정이 있는가? 파리에서 고흐는 물감이 떨어질 때마다 어김없이 ‘현자’ 탕기에게로 향했다. 그 손에는 그림이 있었다. 초라해지거나 거만해지거나 속상하지도 않는 흐뭇한 우정이 고흐의 짧은 인생을 미소 짓게 했다.

김동훈 인문학연구소 ‘퓨라파케’ 대표

핫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