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 못하게 돌 달아 던져"…6·25 때 77명 학살된 염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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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 65명 전원 희생된 야월교회…83세 장로 "9살 때 무서운 광경 봤다"
가족 13명 학살됐지만 용서하고 보복의 연쇄 끊은 이인재 목사 "바닷가 사람들이라서 수영을 할 줄 압니다. 당시에 예수 믿는 사람은 죽이라는 지령이 떨어졌나 봅니다.
(중략) 몸에 돌을 메어서 죽게 했습니다.
"
22일 오전 전남 영광군 소재 염산교회에서 취재진을 맞은 최성남 담임목사가 전시실에 놓인 사람 머리보다 커 보이는 돌덩어리를 가리키며 한국전쟁 초기의 학살 사건을 이렇게 설명했다. 1939년 염산면 봉남리에 건립된 염산교회는 6·25 발발 후 성도 77명이 학살당하는 참극을 겪었다.
이는 한국전쟁 단일 교회 희생자로는 가장 대규모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희생자들은 죽창 등에 찔리거나 수장당했다. 이 교회 전시관에는 목에 돌을 매단 채 수장당하는 노병재 집사, 두들겨 맡으면서도 기도하는 장병태 성도 등 당시 순교자들의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 여러 점 걸려 있었다.
염산교회는 이들이 직면했던 절박한 상황을 방문객들이 실감할 수 있도록 당시 신도들을 수장시킬 때 사용했던 것과 비슷한 크기의 돌에 줄을 달아 목에 걸어 볼 수 있도록 체험장까지 마련해놓았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가 2004년 발간한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20호에 실린 논문 '한국전쟁기 염산면 기독교인 학살의 원인과 성격'(윤정란)에서는 당시 상황에 관한 증언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을 1m씩 거리를 두고 묶었는데 (중략) 돌도 사람 머리 만한 것으로 가슴에 묶어서 (중략) 뒤에서도 20명이 동원돼 한꺼번에 빠뜨렸어요.
이날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염산교회 성도였던 백성규)
통상 교회 신도를 학살한 주체로 인민군, 좌익 혹은 빨치산 세력 등을 지목하곤 한다.
이날 취재진과 동행한 허은철 총신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여러 가지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가 섞여서 이런 일들이 있었다고 보는 게 맞지 않겠느냐"며 "명령을 내린 건 인민군"이라서 인민군으로 통상 표현한다고 해설했다.
유진 벨 선교사가 1908년 천일염 산지로 유명한 영광군 염산면 야월리에 설립한 야월교회는 6·25 발발 직후 성도 전원인 65명이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 교회 최종한(83) 장로는 마을에 거점을 마련한 인민유격대원들이 주민을 "집에서 끌고 가는 것을 봤다"며 "9살 어린 나이로 그 광경을 무섭게 보고 살았다"고 74년 전을 회고했다. 그는 살해하는 현장까지는 감히 따라가서 보지 못했다면서도 "바닷가 모래밭 구덩이에 사람들을 넣고 죽창으로 찔렀다"고 간접적으로 파악한 당시 상황을 전했다.
최 장로는 당시 자기 가족이 기독교 신자가 아니어서 살아남았고 중학교를 졸업한 뒤 신앙생활을 하게 됐다고 인생 역정을 소개했다.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에 따르면 한국전쟁 중 전남 영광군에서는 기독교인 194명이 북한 인민군과 공산주의자들에게 살해당했다.
다만, 전쟁 중 학살은 교회 신자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공보처 집계에 의하면 1950년 6∼12월 염산면에서는 주민 3천350명이 인민군에게 살해당했다.
허은철 교수는 "종교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원한 등도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며 "교인 중 희생된 이들의 숫자는 규명된 것만 다룬 것이어서 더 늘어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신앙은 폭력 앞에 멈추지 않았다.
살아남은 성도들은 불타버린 염산교회를 재건했고, 순교자 김방호 목사의 가족인 김인 전도사는 이 교회 교역자로 부역했다.
야월교회는 전체 교인이 학살당했지만, 이후에 새로운 신자가 생기는 등 명맥을 잇고 있다. 신안 섬마을에 복음을 전하며 1931∼1936년 교회 3곳을 개척하고 기도처 3곳을 세워 '섬 교회의 어머니'로 불린 문준경(1891∼1950) 전도사도 한국전쟁 때 순교했다.
그는 피난을 갔다가 증도에 남아 있는 성도들이 걱정돼 배를 타고 섬으로 돌아갔다가 중동리 백사장에서 좌익 세력의 총에 맞고 교인 약 20명과 함께 순교했다.
신안군 증도면에 설립된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에는 폭력과 복수의 연쇄를 극복한 이인재 목사의 '용서'가 소개돼 있었다.
임자진리교회에서는 1950년 10월 4일 밤 예배하던 신자들이 붙잡혀 48명이 순교했다.
문 전도사의 전도를 받은 이판일 장로와 그 가족 등 13명도 희생됐다.
당시 목표에 머물고 있어 몰살을 면한 이 장로의 장남 이인재는 나중에 국군으로부터 지역 공산당원을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았으나 한명도 죽이지 않고 용서했다고 기념관은 전했다.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에서 활동하는 안상기 장로는 6·25 때 일대에서 수많은 이들이 학살됐지만 한 건의 보복 사건도 없었다면서 "문준경 전도사와 예수 그리스도가 이야기한 용서의 정신이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가족 13명 학살됐지만 용서하고 보복의 연쇄 끊은 이인재 목사 "바닷가 사람들이라서 수영을 할 줄 압니다. 당시에 예수 믿는 사람은 죽이라는 지령이 떨어졌나 봅니다.
(중략) 몸에 돌을 메어서 죽게 했습니다.
"
22일 오전 전남 영광군 소재 염산교회에서 취재진을 맞은 최성남 담임목사가 전시실에 놓인 사람 머리보다 커 보이는 돌덩어리를 가리키며 한국전쟁 초기의 학살 사건을 이렇게 설명했다. 1939년 염산면 봉남리에 건립된 염산교회는 6·25 발발 후 성도 77명이 학살당하는 참극을 겪었다.
이는 한국전쟁 단일 교회 희생자로는 가장 대규모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희생자들은 죽창 등에 찔리거나 수장당했다. 이 교회 전시관에는 목에 돌을 매단 채 수장당하는 노병재 집사, 두들겨 맡으면서도 기도하는 장병태 성도 등 당시 순교자들의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 여러 점 걸려 있었다.
염산교회는 이들이 직면했던 절박한 상황을 방문객들이 실감할 수 있도록 당시 신도들을 수장시킬 때 사용했던 것과 비슷한 크기의 돌에 줄을 달아 목에 걸어 볼 수 있도록 체험장까지 마련해놓았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가 2004년 발간한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20호에 실린 논문 '한국전쟁기 염산면 기독교인 학살의 원인과 성격'(윤정란)에서는 당시 상황에 관한 증언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을 1m씩 거리를 두고 묶었는데 (중략) 돌도 사람 머리 만한 것으로 가슴에 묶어서 (중략) 뒤에서도 20명이 동원돼 한꺼번에 빠뜨렸어요.
이날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염산교회 성도였던 백성규)
통상 교회 신도를 학살한 주체로 인민군, 좌익 혹은 빨치산 세력 등을 지목하곤 한다.
이날 취재진과 동행한 허은철 총신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여러 가지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가 섞여서 이런 일들이 있었다고 보는 게 맞지 않겠느냐"며 "명령을 내린 건 인민군"이라서 인민군으로 통상 표현한다고 해설했다.
유진 벨 선교사가 1908년 천일염 산지로 유명한 영광군 염산면 야월리에 설립한 야월교회는 6·25 발발 직후 성도 전원인 65명이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 교회 최종한(83) 장로는 마을에 거점을 마련한 인민유격대원들이 주민을 "집에서 끌고 가는 것을 봤다"며 "9살 어린 나이로 그 광경을 무섭게 보고 살았다"고 74년 전을 회고했다. 그는 살해하는 현장까지는 감히 따라가서 보지 못했다면서도 "바닷가 모래밭 구덩이에 사람들을 넣고 죽창으로 찔렀다"고 간접적으로 파악한 당시 상황을 전했다.
최 장로는 당시 자기 가족이 기독교 신자가 아니어서 살아남았고 중학교를 졸업한 뒤 신앙생활을 하게 됐다고 인생 역정을 소개했다.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에 따르면 한국전쟁 중 전남 영광군에서는 기독교인 194명이 북한 인민군과 공산주의자들에게 살해당했다.
다만, 전쟁 중 학살은 교회 신자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공보처 집계에 의하면 1950년 6∼12월 염산면에서는 주민 3천350명이 인민군에게 살해당했다.
허은철 교수는 "종교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원한 등도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며 "교인 중 희생된 이들의 숫자는 규명된 것만 다룬 것이어서 더 늘어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신앙은 폭력 앞에 멈추지 않았다.
살아남은 성도들은 불타버린 염산교회를 재건했고, 순교자 김방호 목사의 가족인 김인 전도사는 이 교회 교역자로 부역했다.
야월교회는 전체 교인이 학살당했지만, 이후에 새로운 신자가 생기는 등 명맥을 잇고 있다. 신안 섬마을에 복음을 전하며 1931∼1936년 교회 3곳을 개척하고 기도처 3곳을 세워 '섬 교회의 어머니'로 불린 문준경(1891∼1950) 전도사도 한국전쟁 때 순교했다.
그는 피난을 갔다가 증도에 남아 있는 성도들이 걱정돼 배를 타고 섬으로 돌아갔다가 중동리 백사장에서 좌익 세력의 총에 맞고 교인 약 20명과 함께 순교했다.
신안군 증도면에 설립된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에는 폭력과 복수의 연쇄를 극복한 이인재 목사의 '용서'가 소개돼 있었다.
임자진리교회에서는 1950년 10월 4일 밤 예배하던 신자들이 붙잡혀 48명이 순교했다.
문 전도사의 전도를 받은 이판일 장로와 그 가족 등 13명도 희생됐다.
당시 목표에 머물고 있어 몰살을 면한 이 장로의 장남 이인재는 나중에 국군으로부터 지역 공산당원을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았으나 한명도 죽이지 않고 용서했다고 기념관은 전했다.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에서 활동하는 안상기 장로는 6·25 때 일대에서 수많은 이들이 학살됐지만 한 건의 보복 사건도 없었다면서 "문준경 전도사와 예수 그리스도가 이야기한 용서의 정신이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