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년 만에 '인디언·동성애 작가'에 자리 내준 미국관 [2024 베네치아 비엔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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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리뷰
국가관 하이라이트 - ④ 미국관
강렬한 붉은 색채로 물든 미국관
1930년 개관 이후 첫 인디언 작가 단독 개인전
제프리 깁슨, 소수 민족·성 소수자 애환 담아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공식 개막을 이틀 앞둔 지난 18일. 알록달록 원색의 드레스를 차려입은 한 무리가 자르디니 정원을 가로질렀다. 화려한 구슬 장식으로 치장한 이들은 북미 26개 원주민 부족에서 모인 무용가 그룹. 미국관 앞에 모인 이들은 오지브웨 부족의 전통춤 '징글 댄스'를 선보이며 미국관 개막을 알렸다.미국관이 아메리칸 원주민 예술로 붉게 물들었다. 고고한 대리석 빛깔을 뽐내던 외벽은 강렬한 붉은 바탕으로 칠해졌고, 입구엔 성조기가 아닌 원주민 부족 깃발 8개가 걸렸다. 전시장 내부는 인디언 출신 작가 제프리 깁슨(52)의 회화와 조각, 섬유 공예 등 31점이 가득 채웠다. 미국관이 인디언계 작가를 단독 대표 작가로 내세운 건 1930년 개관 이후 94년 만에 처음이다.깁슨은 현대 미국 인디언 미술을 대표하는 아티스트다. 전통적인 북미 원주민의 소재와 양식을 서양 현대미술과 결합한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형성했다고 평가받는다. 미시시피강 유역 촉토·체로키 부족 출신으로, 현재 그의 작품은 휘트니 미술관 등 세계 유수 기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방인'이란 꼬리표는 깁슨의 삶 내내 따라붙었다. 미국 정부에 의해 보호구역에 강제 이주한 작가의 조부모 대(代)부터 가세가 기울었다. 작가 유년기엔 미군에 보급품을 납품하던 아버지를 따라 미국 독일 영국 등을 떠돌았다. 짧게나마 강원도 속초에도 머물렀다. 노르웨이 작가 룬 올슨과 함께 두 자녀를 입양해 살아가는 동성애자이기도 하다.'나를 배치할 공간(the space in which to place me)'이란 제목이 붙은 올해 미국관 전시 곳곳에는 이방인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기하학적 패턴과 복잡한 비즈 장식, 적극적인 텍스트 활용, 몽환적인 색채로 인디언 문화의 개성을 선보인 건 덤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작가의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전한 직물 작업이 가장 먼저 관객을 맞이한다. 인디언 속담이나 법조문에서 발췌한 문구를 여러 색조의 알파벳으로 새겨넣은 작품이다. '우리는 자유를 원한다', '평화롭게 집회할 수 있는 권리' 등 텍스트로 그동안 억눌렸던 소수 민족의 설움과 분노를 노골적으로 표출한다.전통적으로 '여성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뜨개질과 비즈 아트 등 직물 공예를 전면에 부각한 점도 돋보인다. 남들과는 다른 작가의 성 정체성을 반영한 결과다. 긴 머리를 늘어뜨린 중성적인 조각상 왼쪽 가슴에는 '나는 평범한 남자다(I'm a natural man)'란 푯말을 걸었다.전시의 하이라이트는 후반부에 등장하는 비디오 작업이다. 100여년 전 전 미국 정부에 의해 억압됐던 '징글 댄스'를 9개 화면을 통해 재현했다. 인디언 여성들 사이에서 전승됐던 춤이다. 동양의 한풀이 굿, 혹은 샤머니즘적 의식을 연상케 하는 작품은 인디언 특유의 기하학적인 패턴 조명과 만나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깁슨의 작품은 사회 가장 어두운 곳에 존재했던 소수 민족, 그중에서도 여성을 조명한다. 미국 내 이방인들의 수많은 할머니, 어머니, 언니, 딸의 몸짓을 형상화한 영상 작업의 제목은 '그녀는 혼자 춤추지 않는다(She Never Dances Alon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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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안시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