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 파빌리온이 베네치아 여성 교도소에? 클레어 퐁텐에 '이방인'은 없다 [2024 베네치아 비엔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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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리뷰'Foreigners Everywhere'(영어)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 시리즈의 원작자
실체 없는 예술인 듀오 클레어 퐁텐
아르세날레, 자르디니 등 중심 행사장부터
여성 교도소에까지 수십 개 언어의 네온사인 작품
오는 28일 프란치스코 교황 바티칸 파빌리온 방문
역사상 첫 베네치아 비엔날레 찾을 예정
'Stranieri Ovunque'(이탈리아어)
'處處都都是外人'(중국어 번체자)'….
이탈리아 베네치아 북동부의 아르세날레 공원. 한때 조선소로 사용됐던 이곳의 어두운 다리 밑을 20개 언어로 적힌 색색의 네온사인이 환히 비췄다. 언어는 달라도 의미는 같다. 지난 20일 개막한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대주제인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라는 뜻이다.현대 미술계의 가장 논쟁적인 작가 중 하나인 '클레어 퐁텐(Claire Fontaine)'의 작품이다. 이들이 2004년부터 제작해온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 시리즈는 올해 비엔날레 주제로 채택되며 베네치아 전역을 수놓았다. 양대 행사장인 아르세날레 공원 입구와 자르디니 센트럴 파빌리온(본전시장)은 물론, 외딴 여성 교도소에까지 이들의 손길이 닿았다.
빨강과 노랑, 파랑, 초록 등 여러 형광색으로 이뤄진 낯선 글자들은 "이방인을 포용하자"는 메시지를 전한다.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다. 단단한 유리로 만들어진 네온사인들은 글자 모양에 따라 부드럽게 구부러진 모습. '나와 다른 존재'들을 향해 굳게 닫힌 마음도 유연하게 열릴 수 있다는 희망을 내포한 셈이다.클레어 퐁텐은 실체가 없는 작가다. 엄밀히 따지면 사람이 아닌 허구의 존재다. 두 명의 '조수'를 자처하는 이탈리아 이론가 풀비아 카르네발레와 영국 미술가 제임스 손힐 부부가 클레어 퐁텐의 이름을 내걸고 활동할 뿐이다.이름엔 여러 의미가 있다. 영어로 '맑은 샘(Clear Fountain)'이자, 프랑스의 대중적인 문구 브랜드의 이름이다. 한국으로 치면 모나미나 모닝글로리 정도. 소변기를 뒤집어 놓고 '샘(Fountain·1917)'이란 제목을 붙인 현대 미술의 아버지 마르셀 뒤샹한테서 따온 표현이기도 하다. 뒤샹이 기성 제품을 예술로 승화했듯, 클레어 퐁텐은 동전과 네온사인, 깃발, 벽돌 등 '레디 메이드' 사물을 활용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이민자 문제와 기후 위기, 페미니즘 등 사회적 이슈가 이들의 관심사다. 지난 2020년 명품브랜드 디올(Dior)과 협업한 AW20 패션쇼에서 펼쳤던 퍼포먼스가 단적인 예다. 런웨이 천장에 '여성의 사랑은 무급 노동이다' '여성스럽다는 미적 기준은 레디메이드다'란 직설적인 문구를 걸며 화제가 됐다.
클레어 퐁텐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올해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도 마찬가지다. 연간 80만명 넘게 방문하는 자르디니 공원은 물론, 베네치아 섬의 가장 외딴 곳인 주데카 교도소에도 작품을 걸었다. 13세기 지어진 주데카 교도소는 수녀원과 매춘부들을 위한 교화소, 병원으로 사용되다 최근 여성 전용 수감시설로 운영되고 있는 공간이다. 작가는 교도소 벽면에 '우리는 밤새 당신과 함께합니다(이탈리아어·Siamo con voi nella notte)'란 네온사인을 전시했다. 포용해야 할 이방인의 대상을 사회에서 격리된 범법자로도 확장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논란도 많다. 미국 미술 전문 매체 아트넷은 "교도소 안뜰에 전시된 클레어 퐁텐의 작품은 서정적인 위로의 메시지를 전한다"면서도 "기괴하다"고 평했다. 올해 바티칸 국가관엔 클레어 퐁텐 말고도 ‘현대미술의 악동’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거대한 발바닥 벽화 ’Father‘(2024) 등이 걸렸다. 오는 28일엔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 전시관을 방문해 역사상 최초로 비엔날레에 참석하는 교황이 될 예정이다. 카텔란은 1999년 운석에 맞이 쓰러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묘사한 조각으로 (바티칸 입장에선) 악명이 높은 작가.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 작품들을 보고 어떤 메시지를 전할 지 기대되는 대목이다. 바티칸 파빌리온은 온라인 사전 예약제로만 운영된다. 수감자들이 교도소 작업장에서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한 유니폼을 입고 투어를 안내한다.
베네치아=안시욱·김보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