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스토커가 묻는다 "당신도 나처럼 상처받은 적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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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7부작런던의 한 술집. 안쓰러운 행색의 마사(제시카 거닝)가 멍하니 앉아있다. 바텐더 도니(리처드 개드)가 따뜻한 홍차 한잔을 무료로 건넸을 때, 그녀는 환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저는 잘나가는 변호사예요. 고급 저택도 몇 채나 있죠.”
리처드 개드 감독의 자전적 드라마
뛰어난 몰입감, 지독한 진실로 멱살 잡고 가는 이야기
" 따뜻한 차 한 잔 건넸더니 최악의 스토커가 깨어났다"
도니는 그 모든 게 거짓임을 알지만 그냥 웃어준다. 그녀가 악명 높은 스토커란 걸 몰랐던 것이다. 이내 저속한 내용의 이메일이 그에게 수만 개씩 밀려든다. 집과 직장과 가족까지 무차별적으로 그녀에게 침범당한다. 넷플릭스 7부작 <베이비 레인디어>는 호러 스릴러처럼 시작한다. 사소한 연민이 불러온 끔찍한 집착. 우리의 관심은 스토커를 퇴치 또는 치유(그게 가능하다면) 할 수 있는가다. 그런데 바텐더 도니는 지독한 타인보다 더 지독한, 자신의 내면과 얽혀있다.다 큰 남자를 ‘귀여운 아기 순록’으로 부르는 '스토커' 마사는 제정신일 리 없다. 스탠딩 코미디언이 본업인 도니의 공연장에 그녀가 난입한다. 그녀의 앞뒤 가리지 않는 독설은 도니의 썰렁한 농담보다 더 큰 객석 반응을 얻는다. 덕분에 무대를 잘 마무리했다면 도니가 고마워해야 할까.
영국의 작가인 리처드 개드가 직접 겪은 이야기다. 드라마의 각본과 연출, 주인공 또한 그가 도맡았다. 원작은 그의 모놀로그(1인극) 연극이었지만, 넷플릭스로 와서 제시카 거닝(마사 역)의 훌륭한 연기가 더해졌다. 빈틈없는 씬 연결, 빠른 극 전개 덕분에 몰입감이 높다. ‘극도로 집착하는 여자’하면, 영화 <미저리>(1991)를 떠올리게 된다. <미저리>의 그녀가 무자비하고 용의주도한 악당이었다면, 마사는 그런 악을 실행할 전략도 능력도 부족하다. 쓰레기가 가득한 집에서 생쥐처럼 웅크린 그녀의 모습은 때때로 안쓰럽다. 도니와 그의 연인에게 온몸으로 달려들 때까지는.
여성 스토커에게 경찰이 대처하는 데엔 한계가 있다. 더 큰 문제는 도니 본인이다. 그녀의 연민에 거꾸로 그가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신도 나처럼 상처받은 적 있죠?” 마사의 질문에 도니는 꽁꽁 숨겼던 과거를 되짚기 시작한다.그 과정은 감정의 롤러코스터, 또는 심연으로 추락하는 자이로드롭을 타는 것 같다. 도니는 성적인 혼란을 겪으며 방황 중이다. 코미디언이란 꿈도 멀어져만 간다. 이 모든 파국의 근원은 기억의 한 지점으로 향한다.도니의 고백은 솔직하다. 그렇기에 어떤 이에겐 불편하고 충격적일 수도 있다. 드라마는 중반에 이르러 ‘시청에 주의를 요한다’는 경고를 띄운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경고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경고를 보고 시청을 중단한다면 4회 즈음일 것이다.)
그의 용기는 삶을 완전히 복구할 수 있을까. <베이비 레인디어>의 비범함은 그 답을 쉽게 내리지 않는 데 있다. 치유와 감동을 거쳐,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은 시점에 더 큰 복병이 나타난다.
이는 나를 아기 순록으로 부르는 스토커보다 더 어이없고 버거운 것들이다. 위대한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 그럴 수 없는 현실 사이에 있는 것들. 이 때문에 드라마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팽팽한 갈등을 놓지 않는다.뭐 하나 해결되는 것 같지 않고 혼란스럽게만 느껴진다면 이 때문일 것이다. 악질 스토커의 속 시원한 말로를 기대했다면 <베이비 레인디어>가 불만족스러울 가능성이 높다.그런 시청자들도 마지막 장면에선 여운을 느낄 것이다. 뜻밖의 장소에서 벌어지는 작은 사건. 어떤 이는 수미상관 (처음과 끝을 대응시키는 구성법)을, 어떤 이는 희망 같은 것을 떠올릴지 모른다. 우리는 최악의 적대자와 싸우며 소중한 것을 깨닫곤 한다. 그 상대가 마사 같은 스토커는 아니길 바라지만.
김유미 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