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로 얼룩진 아이, 사랑과 관심이 필요해

[arte] 최승연의 뮤지컬 인물 열전

뮤지컬
연출 박소영, 한국어 대본 한정석
제작 에스엔코(주)
2024. 3. 28~6. 23,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디어 에반 핸슨> 공연 사진 / ⓒ 에스엔코(주)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이 논레플리카 버전으로 초연되고 있다. 이번 공연은 한국 초연이지만 마치 초연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브로드웨이 초연 멤버 벤 플렛 (Ben Platt) 주연 뮤지컬 영화로 이미 알려져서만은 아니다. <디어 에반 핸슨>은 그동안 한국 대학가에서 아마추어 공연으로 간혹 시도되었고, 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넘버 시연으로 방송된 적도 있었다. 그래서 뮤지컬을 아는 사람이라면, 혹은 뮤지컬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에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작품은 에반을 쉽게 설명하지 않는다. 물론 어떤 뮤지컬도 인물의 모든 것을 드러내놓고 보여주는 건 아니다. 하지만 <디어 에반 핸슨>은 불안 장애를 앓고 있는 고3 에반의 거짓말을 플롯의 핵심으로 다루는 데다가, 에반을 둘러싼 사람들이 모두 ‘결핍’의 상태에서 에반과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에 더 섬세하게 인물을 다룬다. 에반은 공연 내내 현실과 가상을 넘나들며 결핍을 채우려 하고, 여타 인물들 역시 가상 세계의 에반에게 자기 욕망을 던지다가 사건이 종결된 후에야 모두 차분하게 현실로 돌아온다.
&lt;디어 에반 핸슨&gt; 공연 사진 / ⓒ 에스엔코(주)

넘버 'For Forever'와 거짓말

<디어 에반 핸슨> 1막에 나오는 ‘For Forever’는 에반의 거짓말이 시작되는 넘버이자, 에반이 누구인지 실마리를 제공하는 넘버다. 코너는 갑자기 자살을 했고 에반은 어찌하다 보니 코너와 가장 친했던 친구로 그 가족들에게 인식되어 있다. 물론 에반과 코너는 전혀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에반은 코너의 집에 초대를 받아 자신이 코너와 얼마나 친한 친구였는지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둘은 마치 비밀리에 연애하던 고등학생 게이 커플들처럼 비밀 이메일 계정으로 소통했고 코너 가족의 추억이 깃든 과수원에 가서 우정을 나누었다. 그들은 풍경을, 하늘을, 태양을 바라보며 편안함을 느꼈다. 심지어 에반은 가장 높은 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졌지만 코너가 자신에게 와줘서 괜찮았다. 코너의 돌출적인 행동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겪었던 신시아는 이런 에반의 이야기에 크게 감동한다.
&lt;디어 에반 핸슨&gt; 공연 사진 / ⓒ 에스엔코(주)
이 ‘For Forever’의 이야기는 에반의 명백한 거짓말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에반의 희망 사항 같은 것이다. 무엇이 그를 자극한 것일까. 사실 에반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었지만 그 방법을 몰라 항상 외로웠던 아이였다. 코너의 동생 조이를 짝사랑하고 있었지만 마음을 전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는 언제나 세상에 혼자 던져진 것 같았다. 그래서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 희망하면서 여름방학 공원 아르바이트 도중 나무에서 스스로 떨어졌다. ‘For Forever’는 ‘누군가’의 자리에 죽은 코너를 놓고 에반이 스스로를 위로하는 노래였다. 코너는 우연히 에반의 삶에 들어왔지만 에반은 그를 통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히 알고 직진했던 것이다.

결핍의 원천과 가상 세계

그는 사랑과 관심이 필요했다. 에반은 어린 시절 부모가 이혼하면서 세상에 혼자 남겨질 수 있다는 공포를 경험했다. 그는 아빠가 자기 짐을 트럭에 싣고 떠난 후, 엄마 역시 트럭을 타고 집을 떠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싱글맘이 된 하이디는 단둘이 남겨진 삶을 감당하기 위해 밤낮없이 일하고 에반은 외로움에 갇혀 버린다. 이로써 에반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로 성장한다. 자신은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사람들은 자신을 주목하지 않거나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나무 위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어떤지 궁금했다. 호기심이라기보다 우울증의 발로였다.

이런 에반에게 코너의 죽음은 세상이 자신을 주목하는 계기였다. 자신의 말을 경청하며 눈물을 보이고 식탁을 차리는 신시아는 또 다른 엄마였으며, 야구 글러브 다루는 법을 가르쳐 준 래리는 새로운 아빠였다. 자신의 진짜 속마음을 코너의 말로 바꿔 조이의 사랑도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에반은 자신에게 완벽해 보이는 코너 가족의 일원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심지어 코너의 죽음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우연히 터져 나온 말들로 에반은 세상의 관심까지 얻는다. 코너는 에반이 더 이상 혼자가 아님을 보증하는 신화적 존재가 되었으며, 세상의 에반과 같은 존재들에게 ‘두 친구’의 서사는 위로를 선물한다. 코너는 그렇게 에반의 얼터 에고가 된다.
&lt;디어 에반 핸슨&gt; 공연 사진 / ⓒ 에스엔코(주)
에반이 다시 현실로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에반의 거짓은 드러나고 코너의 가족과 세상은 그를 더 이상 주목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오직 하이디만이 그를 이해하고 보듬는다. 이제 에반은 엄마 하이디가 만들어 놓은 삶의 터전 안에서 성실하게 미래를 향해 발을 내딛는다. 그는 언젠가 다시 나무 위로 올라가겠지만, 이번에는 나뭇가지를 단단히 잡고 새로운 빛을 향해 걸어갈 것이다. <디어 에반 핸슨>은 이렇게 에반의 성장을 그린다. 결말의 과장되지 않은 톤은 에반의 현재와 미래가 현실 안에서 자라고 있음을, 에반이 비로소 자기 자신을 믿기 시작했음을 소박하게 보여준다. 에반의 꿈이 관객들에게 위로가 되는 이유다.▶▶▶[관련 리뷰] 라라랜드의 그들이 작곡한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버릴 게 하나도 없다
&lt;디어 에반 핸슨&gt; 공연 사진 / ⓒ 에스엔코(주)
최승연 뮤지컬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