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더 나아지길 꿈꾼다"는 83세의 바이올린 거장 제이미 라레도

바이올리니스트 제이미 라레도 단독 인터뷰
글렌 굴드·아이작 스턴 등과 명반 남긴 주역

‘에스프레시보! 피아노 콰르텟’ 첫 내한 공연
“브람스, 멘델스존 감정 더 생생하게 전할 것”

천부적 재능에 노력까지 겸비…“기본기 연습 매달려”
“나이 들키고 싶지 않아…아직도 배가 고파”
볼리비아 태생의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 제이미 라레도가 지난 26일 서울 인사동의 한 호텔에서 한국경제신문과 단독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임대철 기자
“1920년대에 예후디 메뉴인이 있었고, 1930년대에 아이작 스턴이 있었다. 그리고 지난 밤 (그 자리에) 제이미 라레도가 있었다.” 미국 일간지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가 1952년 11살의 나이로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면서 국제무대에 데뷔한 바이올리니스트 라레도(83)를 향해 남긴 찬사다. 저명한 클래식 전문가들이 ‘바이올린계 대부’의 후예로 라레도를 점찍은 건 섣부른 호들갑이 아니었다. 17세가 되던 해 라레도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대회 역사상 최연소 우승 기록을 세우면서 돌풍을 일으켰다.

그가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 첼리스트 파블로 카살스,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 같은 전설적인 음악가들과 남긴 연주는 ‘세기의 명연(名演)’으로 지금까지 회자된다. 이 시대 최고의 바이올린 거장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라레도가 한국을 찾았다. 올해 19회를 맞은 서울 스프링 실내악 축제 무대에 오르기 위해서다. ‘에스프레시보! 피아노 콰르텟’의 첫 내한 공연(4월 30일)과 기획 공연(5월 1~3일) 등에서 연주를 들려준다. 라레도는 지난 26일 서울 인사동의 한 호텔에서 진행한 한국경제신문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자신을 “운 좋은 바이올리니스트”라고 소개했다.
볼리비아 태생의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 제이미 라레도가 지난 26일 서울 인사동의 한 호텔에서 한국경제신문과 단독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임대철 기자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게 불과 10대 때 일이었어요. 생전 처음 해보는 작품으로 뉴욕 필하모닉, 런던 심포니 등 명문 악단들과 협연해야 하는 상황도 있었고, 1년에 100번 넘는 공연 일정을 소화하느라 숨도 제대로 못 쉴 만큼 힘든 순간들도 많았습니다. 슬럼프도 몇 번 있었지만, ‘연주자로 꼭 살아남겠다’는 일념으로 버텼습니다. 제 삶에선 바이올리니스트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거든요. 바이올린을 잡는 것만이 나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할 만큼, 이 작은 악기를 온 마음 다해 사랑했습니다. 연주를 평생 할 수 있는 것, 그 하나만으로도 전 제게 최고의 행운이 따랐다고 생각합니다.”

라레도는 아내인 첼리스트 샤론 로빈슨, 피아니스트 조셉 칼리히슈타인과 45년간 ‘KLR 트리오’로 활동해온 실내악의 대가로도 유명하다. 칼리히슈타인이 세상을 떠난 뒤 피아니스트 안나 폴론스키, 비올리스트 밀레나 파자로반 드 슈타트와 함께 새로운 앙상블인 ‘에스프레시보! 피아노 콰르텟’을 창단해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이들이 첫 내한 공연에서 들려줄 작품은 멘델스존, 브람스(3번), 드보르자크(2번) 피아노 4중주곡. “오케스트라에선 연주자들이 지휘자를 통해 음악을 만들어내지만, 실내악에선 연주자 한 명 한 명이 직접적으로 교감하면서 더 섬세하게 작곡가의 언어를 풀어낼 수 있죠. 브람스의 인간적인 면모, 멘델스존의 신선한 영감 등 작품에 담긴 심상, 감정을 더 생생하게 전하고 싶습니다.”
볼리비아 태생의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 제이미 라레도가 지난 26일 서울 인사동의 한 호텔에서 한국경제신문과 단독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임대철 기자
다섯 살 때 바이올린을 시작해 여덟 살 때 첫 독주회를 연 인물인 만큼 전형적인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의 음악은 노력의 산물이다. 라레도는 하루도 빠짐없이 기본기 연습인 ‘장단조 스케일(음계)’을 1시간 넘게 하고 나서야, 연주곡 연습에 돌입한다. 웬만한 20~30대 연주자들도 귀찮다는 이유로 빼먹기 일쑤인 기본기 연습을 70년 넘게 고수해 온 이유는 무엇일까. “무대에서만큼은 나이를 들키고 싶지 않아요. 제게 손은 ‘연주의 도구’이기에, 감각의 예민함을 유지하기 위한 연습만큼은 절대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습관처럼 몸에 밴 기본기 연습이 지금까지 제 플레이(연주 기량)를 높은 수준으로 유지시켜준 힘이었다고 생각해요."미국 클리블랜드 음대 교수인 그는 힐러리 한, 제니퍼 고 같은 유명 바이올리니스트들을 길러낸 스승으로도 명성이 높다. 그에게 훌륭한 연주자의 조건을 묻자, “자신만의 소리를 가지고 있는 음악가”란 답이 돌아왔다. “요즘 연주자들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테크닉이 뛰어나지만, 정작 그 너머의 음악적 개성을 갖추고 있는 경우가 많지 않아요. 하이페츠, 오이스트라흐 같은 옛날 바이올리니스트들은 첫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잖아요. 소리로 남아야 하는 연주자에게 그보다 중요한 건 없죠. 그래서 제자들에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산 사람 말고, 죽은 사람의 연주를 자주 들어라’라고 얘기해요. 하하.”
볼리비아 태생의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 제이미 라레도가 지난 26일 서울 인사동의 한 호텔에서 한국경제신문과 단독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임대철 기자
여든이 넘은 나이. 남부러울 것 없는 커리어를 쌓으며 거장의 반열에 오른 바이올리니스트지만, 그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고 했다. “전 지금도 연주자로서 더 나아지는 걸 꿈꿉니다. 매일 바이올린을 더 잘 켜고 싶고, 작곡가의 의도를 더 깊이 분석하고 싶고, 음악가로서 발전하고 싶어요. 음악에 대한 열망은 아마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꺼지지 않을 것 같아요. 거창한 목표 따윈 없지만 그저 하나 바랄 수 있다면, 제 연주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고 그 음악을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게 그것보다 더 값진 일은 없을 겁니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