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안 하면 저렇게 돼" 손가락질…발끈한 男 보인 반응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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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공부 안 하면 나중에 커서 저 아저씨처럼 된다.”
캔버스를 옆구리에 끼고 길거리를 걸어가는 화가를 보며, 17세기 스페인의 엄마들은 아마도 이렇게 아이들에게 속삭였을 겁니다. 당시 스페인에서 화가는 천한 직업. 사람들은 화가들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림은 배운 것 없는 무식한 사람들이나 하는 거잖아.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붓질이나 끼적이는 거야. 집안 장식을 할 때나 겨우 쓸모가 있지. 그러니 화가를 제대로 된 직업이라고 볼 수는 없어. 밥벌이를 멀쩡하게 하는 사람도 거의 없고 말이야. 너도 저렇게 되기 싫으면 일을 열심히 배워야 한다.”젊은 화가는 그런 말이 너무 싫었습니다. 기분이 나빴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고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예술의 위대함을 사람들이 몰라준다는 안타까움이 더 컸습니다. ‘누가 봐도 감탄할 수밖에 없는 그림을 그릴 거야. 그래서 화가도 고귀한 직업이 될 수 있다는 걸, 예술이 아름답다는 걸 보여주겠어.’ 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그리고 벨라스케스는 그 다짐을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왕의 고귀한 모습을 그리는 화가이자 귀족이 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왕족의 아름다운 초상화들은 전 유럽 왕가를 돌아다니며 뜨거운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의 걸작들은 고야·마네·피카소 등 수많은 후대 예술가들에게도 거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를 통해 결과적으로 벨라스케스는 인류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꿨습니다. 하지만 그가 걸었던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공부 안하면 저렇게 되는 아저씨’에서 시작해 ‘그림의 신’으로 영원히 남은, 벨라스케스의 성공 스토리.
파체코의 그림 실력은 거장이라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현명한 스승이었습니다. 파체코는 벨라스케스에게 글부터 먼저 가르쳤습니다. 당시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이 20%정도에 불과했고, 대부분의 화가가 글을 못 읽었던 걸 감안하면 이례적이었습니다. 파체코는 어린 벨라스케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도 어렴풋이 알아챘겠지만 그림은 정말 위대한 예술이야. 화가도 훌륭하고 고귀한 직업이네.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있어. 나도 그걸 사람들에게 알리기엔 실력이 부족하고. 하지만 자네에겐 재능이 있네. 열심히 공부해서 사람들에게 예술의 위대함을 알려주게.”
아직 10대 소년에 불과한 제자에게 그런 큰 기대를 하게 만들 정도로, 벨라스케스의 재능은 탁월했습니다. 그는 금세 세비야의 ‘1타 화가’가 됐습니다. 당시 세비야는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을 잇는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지나가는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부(富)가 모여드는 곳이었지요. 이런 곳에서 가장 실력있는 화가가 됐으니, 벨라스케스는 이대로만 살아도 평생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었습니다.하지만 벨라스케스의 눈은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가 스물세 살이던 1622년 익숙하고 풍족한 삶을 버리고 궁정 화가에 지원했던 건 그래서였습니다. ‘여기서 일하면 큰 부자가 될 수는 있겠지만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순 없다. 하지만 궁정에서 일하며 스페인 왕을 그리는 화가는 얘기가 다르다. 잘만 하면 세상을 바꿀 수도 있겠지.’
열일곱 살이던 왕 펠리페 4세(1605~1665)는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보자마자 그에게 푹 빠졌습니다. 예술을 사랑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그는 어릴 때부터 가문이 전 유럽에서 긁어모은 명작들을 보며 자랐기에 그림 보는 눈이 높았지만, 궁정 화가들의 평범한 실력에 실망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러던 중 나타난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왕의 눈을 그야말로 번쩍 뜨이게 만들었습니다.기존의 궁정 화가들도 알았습니다. 자신들은 새파랗게 젊은 벨라스케스에게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그들은 벨라스케스를 비방하며 그의 실력을 깎아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폐하,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잠깐 보기만 좋을 뿐입니다. 좀 사실적이긴 하지요. 하지만 그 안에 심오한 철학이 없단 말입니다.”
잠자코 그 말을 듣고 있던 왕은, 천천히 입을 뗐습니다. “그래? 그러면 누구 실력이 더 뛰어난지 궁정 화가 경연대회를 열어 보자.” 궁정 화가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머잖아 열린 경연대회에서 벨라스케스는 관람객들의 몰표를 받아 1등을 차지했습니다. 한 귀족은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정한 그림’을 봤다.” 왕은 만족해하며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스페인 왕실 사람들의 초상화는 자네만 그리도록 하게. 왕을 그릴 자격이 있는 건 오직 자네뿐이야.”
하지만 벨라스케스의 이런 자신감도 크게 꺾일 날이 있었습니다. 벨라스케스가 서른 살이던 1629년, 당시 유럽 최고의 화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가 스페인 궁정을 방문한 게 계기였습니다. 왕은 루벤스에게 자신을 비롯한 왕실 가족의 초상화를 맡겼습니다. 벨라스케스는 못마땅했습니다. ‘언제는 나한테만 왕의 초상화를 그릴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하시더니, 이번에는 루벤스에게 그림을 그리게 시키셨네. 루벤스가 유명하고 잘 그리긴 해도…. 그 정도로 대단한가?’ 루벤스도 벨라스케스의 이런 불만을 알아챘습니다.‘귀여운 녀석이군. 콧대를 한 번 꺾어 줘야겠어.’ 루벤스는 코웃음을 친 뒤 벨라스케스가 전에 그렸던 왕의 기마 초상화 구도를 살짝 바꿔 훨씬 더 멋진 그림을 그려냈습니다. 완성된 작품을 보고 벨라스케스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아,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벨라스케스는 그 길로 루벤스를 찾아가 자신의 텃세에 대해 사과하고, 가르침을 구했습니다.
루벤스는 웃으며 벨라스케스의 사과를 받아 줬습니다. 사실 루벤스는 벨라스케스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젊고 유망한 데다 열심히 하려는 후배를 보면 도와주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니까요. 루벤스는 스페인에 있는 내내 벨라스케스와 붙어 다녔고, 함께 그림을 보며 조언을 해주는 등 많은 가르침을 줬습니다. 그리고 스페인을 떠나기 전, 마지막 조언을 남겼습니다. “자네의 재능은 정말 뛰어나. 하지만 경험이 부족하네. 이탈리아로 가서 그림을 더 많이 보고 오면 훨씬 좋아질 거야.”벨라스케스는 그 길로 왕에게 휴직을 신청했습니다. “2년만 쉬겠습니다. 이탈리아에서 공부하고 와서 더 멋진 그림을 그려내겠습니다.” 벨라스케스를 아끼던 왕은 요청을 흔쾌히 받아줬습니다. 그 길로 여행길에 오른 벨라스케스는 1년 반동안 이탈리아에서 유학하며 티치아노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수많은 선배 거장들의 기술을 훔쳐낸 후 돌아왔습니다. ‘스페인의 훌륭한 화가’로 떠났던 그는, 어느새 ‘세계 최고의 화가’가 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벨라스케스는 깨달았습니다. 너무 꼼꼼하고 매끄럽게 그리면 오히려 그림이 부자연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요. 사람은 뭔가를 볼 때 카메라로 사진을 찍듯 순간적으로 모든 세부 사항을 파악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집중하는 것, 빛과 조명 등에 따라 강조되는 순간적인 인상 등을 위주로 정보를 받아들이지요. 그래서 그림이 사실적으로 보이기 위해서는 오히려 적당한 생략이 필요합니다. 한올한올 직물을 그려넣은 그림보다 대담한 붓질 몇 번으로 표현한 옷감이 더 사실적으로 보이는 것처럼요.이는 수많은 작품을 보고 예술과 과학에 관한 책들을 섭렵한 끝에 벨라스케스가 도달한 결론이었습니다. 이런 벨라스케스의 작품은 현실 그 자체보다 보는 이가 느끼는 ‘순간적인 인상’을 강조했던 200년 뒤 인상주의 후배들의 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인상주의의 선구자 마네가 벨라스케스를 ‘화가들의 화가’라고 부른 이유입니다.
벨라스케스는 끝없는 연습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증명해 나갔습니다. 예컨대 벨라스케스의 ‘파블로 데 바야돌리드’의 배경에는 벽이나 바닥 등 공간을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그 어떤 표식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델의 발은 공중에 붕 떠있는 게 아니라 단단한 바닥을 딛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인간의 눈은 인물과 배경에 동시에 초점을 맞출수 없기에, 배경을 흐릿하게 처리하더라도 모델을 잘만 그리면 여전히 사실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을 시험한 작품입니다. 이탈리아에서라면 이런 그림은 저평가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꼼꼼할수록 아름답다’는 상식에 어긋나는 작품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벨라스케스는 기존의 생각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벨라스케스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는 건, 궁정에 있는 왜소증 환자들을 그린 작품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유럽 궁정에서 왜소증 환자는 인간이라기보다 일종의 장식품 같은 존재였습니다. 궁정의 커다란 위엄을 빛내는 소품 역할이자, 어린 왕자나 공주들의 매를 대신 맞아주는 하인 역할이었지요. 궁정 사람들도 왜소증 환자들을 같은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벨라스케스는 왜소증 환자를 똑같은 인간으로 바라봤습니다. 그의 왜소증 환자 작품들에는 조롱도 동정도 없습니다. 대상에 대한 침착한 관찰과 이를 정확히 반영한 묘사가 있을 뿐입니다. 덕분에 그의 그림 속 왜소증 환자들은 다른 초상화 속 사람들, 심지어 왕족과 비교해도 뒤쳐지지 않는 존엄을 갖고 있습니다.
벨라스케스가 섬겼던 왕 펠리페 4세는 사실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16살의 나이로 그가 물려받았던 유럽 최강의 제국은, 사실 속 빈 강정이었습니다. 오랜 종교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 전쟁 자금을 조달하며 악화된 산업 기반과 민심, 삐걱대는 행정 체계…. 펠리페 4세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기울어가는 ‘무적 함대’ 스페인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게다가 갑자기 사망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어린 나이에 급히 왕위에 오른 탓에, 그는 집권 초기부터 대신들의 견제에 시달렸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다섯 살 형인 벨라스케스는 예술 애호가인 펠리페 4세가 의지할 수 있는 좋은 친구이자 버팀목이 돼 줬습니다. 당연히 벨라스케스도 자신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는 왕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벨라스케스가 기꺼이 어린 왕자와 공주들의 좋은 놀이 상대이자 삼촌이 돼 준 것도 그래서였습니다.
그러던 중 1640년대 스페인 왕실에 여러 비극이 겹칩니다. 1644년 펠리페 4세가 사랑하던 왕비가 죽었고, 2년 뒤 장남이자 후계자였던 아들까지 세상을 떠난 겁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연달아 세상을 떠나자 펠리페 4세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이를 위로해준 게 친구이자 가족 같았던 벨라스케스였습니다. 초상화를 그리는 벨라스케스에게 어느날 왕은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나를 좀 도와주게나.”
이는 벨라스케스에게 좋은 기회였습니다. 이미 화가로서 벨라스케스의 기량과 명성은 더 올라갈 수 없을 정도로 최정상급이었습니다. 그에게 부족한 건 단 하나. 벨라스케스 자신과 그가 그린 작품, 나아가 화가 전체의 권위를 높일 수 있는 ‘고귀한 신분’이었습니다. 왕을 열심히 돕는다면 그도 티치아노나 루벤스, 반 다이크처럼 기사 작위를 받아 귀족이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는 벨라스케스가 젊은 시절부터 품었던 꿈의 실현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습니다. 20년지기 친구가 눈 앞에서 슬픔과 절망으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벨라스케스는 친구를 돕기로 결심합니다.붓을 놓은 벨라스케스는 궁정의 각종 일을 맡아 처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벨라스케스는 궁정을 청소하는 인력들을 도맡아 관리했고, 겨울철에는 궁전 바닥을 덮는 매트를 교체하거나 장작을 주문해 채워넣는 등 궁정 내 시시콜콜한 일들을 처리하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왕은 그의 궁정 내 직위를 계속해서 올려 줬고, 그럴수록 벨라스케스의 일은 더 바빠졌습니다.
이런 초고속 승진을 다른 사람들은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여론은 1652년 궁정의 ‘마스터 키’를 관리하는 고위 행정직을 뽑을 때도 드러났습니다. 왕의 추천으로 후보에 이름을 올린 벨라스케스를 제치고 다른 후보가 몰표를 받은 겁니다. 하지만 왕은 이런 결과를 무시했습니다. “그냥 벨라스케스로 임명해.” 얼마나 벨라스케스를 깊이 의지했는지 왕은 전쟁터에 나갈 때도 벨라스케스를 데리고 갔고, 그에게 미술품 수집과 궁전 장식 등을 맡겼으며, 이탈리아로 벨라스케스가 출장을 갔을 때도 빨리 돌아오라고 매일같이 재촉했습니다.그렇다고 벨라스케스가 그림을 잊은 건 아니었습니다. 1648~1650년 이탈리아에서 그는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과 ‘후안 데 파레하의 초상’ 등 그의 최고 걸작들을 그려냅니다. 벨라스케스의 작품들을 본 ‘예술의 본고장’ 로마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시에 나온 다른 그림은 모두 그림처럼 보였지만, 벨라스케스의 그림만큼은 진짜처럼 보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벨라스케스는 ‘고귀한 신분’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로비를 하고, 돈을 뿌리고, 왕에게 청원하고, 심사에서 떨어져도 다시 도전한 끝에 그는 예순 살이던 1659년 산티아고 기사단에 입단하는 데 성공합니다. 온 삶을 바쳐 ‘천한 직업이었던 화가도 위대한 작품을 남기고 고귀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쾌거였습니다. 그리고 평생의 소원을 이룬 벨라스케스는 1년 뒤 소임을 마쳤다는 듯 세상을 떠납니다.
‘시녀들’은 한 발 더 나아간 벨라스케스의 최고 걸작입니다. 화가들이 뽑은 미술사 최고의 명작이기도 합니다. 이때까지 수많은 예술가와 미술사학자들이 이 그림에 영향을 받았고, 제각기 다른 해석을 내놨습니다. 그림은 오늘날의 스냅사진과 비슷한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겠습니다.최근 나오는 해석들에 따르면 그림 속 상황은 이렇습니다. 어린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가 그림을 그리는 벨라스케스를 보러 왔다. 그래서 시종이 왼쪽에 무릎을 꿇고 물 한 잔을 대접했다. 그 순간 왕과 왕비가 방으로 조용히 들어선다(뒤쪽 거울에 왕과 왕비의 모습이 어렴풋이 비쳐 있음). 사람들은 하나둘씩 왕의 존재를 알아채기 시작했다. 벨라스케스도 왕이 들어온 걸 막 알아차리고 손을 멈춘 그 순간을 그림에 담았다는 겁니다. 요즘 상황에 비유하면, ‘사장님이 갑자기 사무실에 들어온 뒤 0.1초 후를 포착한 사진’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왕과 왕비, 공주와 화가를 동시에 그린 건 ‘예술이 그만큼 고귀하다’는 걸 뜻합니다. 벨라스케스 전부터 화가들은 그림에 화가와 왕을 함께 그려넣어 예술의 고귀함을 간접적으로 강조해 왔습니다. 여기에 더해, 이 독창적인 작품을 통해 벨라스케스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고귀함을 함께 표현했습니다.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순간, 심지어 벌어지지도 않았던 사건을 벨라스케스는 상상과 기술의 힘만으로 현실에 불러냈습니다. 사진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던 시대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놀랍습니다. 자신의 가슴팍에 그려넣은 기사단의 문장은 이런 ‘고귀함’의 완성입니다.
이런 걸작들을 떼놓더라도 벨라스케스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귀감을 줍니다. 그는 평생에 걸쳐 자신의 재주를 갈고닦았고, 최고의 자리에서도 결코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루벤스에게 좌절을 맛본 뒤에도 곧바로 일어나 노력에 더욱 박차를 가했습니다. 또 물질적인 만족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믿는 가치, 즉 예술과 예술가의 고귀함을 증명하기 위해 평생을 싸웠습니다. 그리고 끈기와 집념으로 이를 결국 이뤄내 예술의 역사를 바꿨습니다. 그러면서도 벨라스케스는 주변을 살피는 데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개인의 존엄한 내면을 담아낸 왜소증 환자의 초상화들이 이를 증명합니다.
벨라스케스의 작품들은 4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오늘날까지 수많은 관객에게 감탄과 감동을 선사합니다. 그 배경엔 그의 삶과 철학이 있습니다. 자신이 본 것을 그리는 게 미술이라면, 캔버스에 그려진 결과물은 곧 화가 자신이 세상을 보는 시각을 반영합니다. 그 시각에는 한 인간이 어떤 내면을 갖고 있고, 어떤 생각을 하며 인생을 살아왔는지가 녹아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미술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벨라스케스의 삶은 탁월한 작품이었습니다.
날씨가 맑고 따뜻합니다. 작품 같은 주말 보내세요.**이번 기사는 Velázquez: Painter and Courtier(Jonathan Brown 지음), Collected Writings on Velázquez(Jonathan Brown 지음), Diego Velázquez and His Times(Karl Justi 지음), 디에고 벨라스케스(노르베르트 볼프 지음, 전예완 옮김, 마로니에북스-Taschen 펴냄)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캔버스를 옆구리에 끼고 길거리를 걸어가는 화가를 보며, 17세기 스페인의 엄마들은 아마도 이렇게 아이들에게 속삭였을 겁니다. 당시 스페인에서 화가는 천한 직업. 사람들은 화가들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림은 배운 것 없는 무식한 사람들이나 하는 거잖아.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붓질이나 끼적이는 거야. 집안 장식을 할 때나 겨우 쓸모가 있지. 그러니 화가를 제대로 된 직업이라고 볼 수는 없어. 밥벌이를 멀쩡하게 하는 사람도 거의 없고 말이야. 너도 저렇게 되기 싫으면 일을 열심히 배워야 한다.”젊은 화가는 그런 말이 너무 싫었습니다. 기분이 나빴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고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예술의 위대함을 사람들이 몰라준다는 안타까움이 더 컸습니다. ‘누가 봐도 감탄할 수밖에 없는 그림을 그릴 거야. 그래서 화가도 고귀한 직업이 될 수 있다는 걸, 예술이 아름답다는 걸 보여주겠어.’ 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그리고 벨라스케스는 그 다짐을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왕의 고귀한 모습을 그리는 화가이자 귀족이 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왕족의 아름다운 초상화들은 전 유럽 왕가를 돌아다니며 뜨거운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의 걸작들은 고야·마네·피카소 등 수많은 후대 예술가들에게도 거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를 통해 결과적으로 벨라스케스는 인류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꿨습니다. 하지만 그가 걸었던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공부 안하면 저렇게 되는 아저씨’에서 시작해 ‘그림의 신’으로 영원히 남은, 벨라스케스의 성공 스토리.
20대 청년, 왕의 남자가 되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없는 탁월한 시각과 표현력, 창의성을 갖고 있는 사람. ‘화가’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우리가 떠올리는 이미지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사람들 사이에 자리잡은 건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화가는 예술가’라는 생각이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건 16세기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이 생각이 전 유럽의 상식이 된 건 19세기가 돼서였습니다. 그 전까지 화가는 일종의 수공업 기술자 취급을 받았고, 기술자 중에서도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화가를 ‘환쟁이’로 부르며 천대했던 걸 생각하면 쉽습니다.이런 세상에서 벨라스케스가 ‘그림은 예술이고 화가는 예술가’라는 생각을 품게 된 건 스승 덕분이었습니다. 1599년 스페인 세비야의 중산층 평민 집안에서 태어난 벨라스케스는 11살 때 지역 화가인 파체코의 제자로 들어갔습니다. 어릴 때부터 똑똑하고 실력 좋고 인품까지 훌륭했던 벨라스케스를 파체코는 무척 아꼈습니다. 얼마나 아꼈는지, 자신의 딸과 벨라스케스를 결혼시켰을 정도였습니다.파체코의 그림 실력은 거장이라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현명한 스승이었습니다. 파체코는 벨라스케스에게 글부터 먼저 가르쳤습니다. 당시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이 20%정도에 불과했고, 대부분의 화가가 글을 못 읽었던 걸 감안하면 이례적이었습니다. 파체코는 어린 벨라스케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도 어렴풋이 알아챘겠지만 그림은 정말 위대한 예술이야. 화가도 훌륭하고 고귀한 직업이네.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있어. 나도 그걸 사람들에게 알리기엔 실력이 부족하고. 하지만 자네에겐 재능이 있네. 열심히 공부해서 사람들에게 예술의 위대함을 알려주게.”
아직 10대 소년에 불과한 제자에게 그런 큰 기대를 하게 만들 정도로, 벨라스케스의 재능은 탁월했습니다. 그는 금세 세비야의 ‘1타 화가’가 됐습니다. 당시 세비야는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을 잇는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지나가는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부(富)가 모여드는 곳이었지요. 이런 곳에서 가장 실력있는 화가가 됐으니, 벨라스케스는 이대로만 살아도 평생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었습니다.하지만 벨라스케스의 눈은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가 스물세 살이던 1622년 익숙하고 풍족한 삶을 버리고 궁정 화가에 지원했던 건 그래서였습니다. ‘여기서 일하면 큰 부자가 될 수는 있겠지만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순 없다. 하지만 궁정에서 일하며 스페인 왕을 그리는 화가는 얘기가 다르다. 잘만 하면 세상을 바꿀 수도 있겠지.’
열일곱 살이던 왕 펠리페 4세(1605~1665)는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보자마자 그에게 푹 빠졌습니다. 예술을 사랑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그는 어릴 때부터 가문이 전 유럽에서 긁어모은 명작들을 보며 자랐기에 그림 보는 눈이 높았지만, 궁정 화가들의 평범한 실력에 실망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러던 중 나타난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왕의 눈을 그야말로 번쩍 뜨이게 만들었습니다.기존의 궁정 화가들도 알았습니다. 자신들은 새파랗게 젊은 벨라스케스에게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그들은 벨라스케스를 비방하며 그의 실력을 깎아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폐하,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잠깐 보기만 좋을 뿐입니다. 좀 사실적이긴 하지요. 하지만 그 안에 심오한 철학이 없단 말입니다.”
잠자코 그 말을 듣고 있던 왕은, 천천히 입을 뗐습니다. “그래? 그러면 누구 실력이 더 뛰어난지 궁정 화가 경연대회를 열어 보자.” 궁정 화가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머잖아 열린 경연대회에서 벨라스케스는 관람객들의 몰표를 받아 1등을 차지했습니다. 한 귀족은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정한 그림’을 봤다.” 왕은 만족해하며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스페인 왕실 사람들의 초상화는 자네만 그리도록 하게. 왕을 그릴 자격이 있는 건 오직 자네뿐이야.”
처참한 패배, 그리고
‘왕의 남자’가 된 벨라스케스는 초고속 승진을 시작했습니다. 그가 그린 작품을 보여줄 때마다 왕은 박수를 쳤고, 넉넉한 보수와 선물을 내렸습니다. 벨라스케스도 우쭐해졌습니다. 그럴 만도 했습니다. 이미 그는 스페인 최고의 화가였으니까요. 문화 선진국인 이탈리아에서 온 미술 감정가가 “잘 그리긴 했는데 약간 아쉽다”고 평가했을 때도 벨라스케스는 코웃음을 쳤습니다. “작품 보는 눈이 부족하시군요.”하지만 벨라스케스의 이런 자신감도 크게 꺾일 날이 있었습니다. 벨라스케스가 서른 살이던 1629년, 당시 유럽 최고의 화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가 스페인 궁정을 방문한 게 계기였습니다. 왕은 루벤스에게 자신을 비롯한 왕실 가족의 초상화를 맡겼습니다. 벨라스케스는 못마땅했습니다. ‘언제는 나한테만 왕의 초상화를 그릴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하시더니, 이번에는 루벤스에게 그림을 그리게 시키셨네. 루벤스가 유명하고 잘 그리긴 해도…. 그 정도로 대단한가?’ 루벤스도 벨라스케스의 이런 불만을 알아챘습니다.‘귀여운 녀석이군. 콧대를 한 번 꺾어 줘야겠어.’ 루벤스는 코웃음을 친 뒤 벨라스케스가 전에 그렸던 왕의 기마 초상화 구도를 살짝 바꿔 훨씬 더 멋진 그림을 그려냈습니다. 완성된 작품을 보고 벨라스케스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아,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벨라스케스는 그 길로 루벤스를 찾아가 자신의 텃세에 대해 사과하고, 가르침을 구했습니다.
루벤스는 웃으며 벨라스케스의 사과를 받아 줬습니다. 사실 루벤스는 벨라스케스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젊고 유망한 데다 열심히 하려는 후배를 보면 도와주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니까요. 루벤스는 스페인에 있는 내내 벨라스케스와 붙어 다녔고, 함께 그림을 보며 조언을 해주는 등 많은 가르침을 줬습니다. 그리고 스페인을 떠나기 전, 마지막 조언을 남겼습니다. “자네의 재능은 정말 뛰어나. 하지만 경험이 부족하네. 이탈리아로 가서 그림을 더 많이 보고 오면 훨씬 좋아질 거야.”벨라스케스는 그 길로 왕에게 휴직을 신청했습니다. “2년만 쉬겠습니다. 이탈리아에서 공부하고 와서 더 멋진 그림을 그려내겠습니다.” 벨라스케스를 아끼던 왕은 요청을 흔쾌히 받아줬습니다. 그 길로 여행길에 오른 벨라스케스는 1년 반동안 이탈리아에서 유학하며 티치아노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수많은 선배 거장들의 기술을 훔쳐낸 후 돌아왔습니다. ‘스페인의 훌륭한 화가’로 떠났던 그는, 어느새 ‘세계 최고의 화가’가 돼 있었습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200년 선배
이 시점에서 벨라스케스는 이미 미술사 전체를 통틀어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사실적으로 대상을 그려낸 솜씨만큼이나 대단한 건, 200년 뒤 등장할 인상주의를 연상시키는 독창적인 철학이었습니다. 벨라스케스 전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사실적으로 잘 그린 그림’은 ‘꼼꼼하게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대상을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꼼꼼하게 표현할수록 사실적으로 보인다는 생각이었지요. 카라바조를 비롯해 사실적인 그림으로 유명했던 거장들도 이런 생각에 기반해 그림을 그렸습니다.하지만 벨라스케스는 깨달았습니다. 너무 꼼꼼하고 매끄럽게 그리면 오히려 그림이 부자연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요. 사람은 뭔가를 볼 때 카메라로 사진을 찍듯 순간적으로 모든 세부 사항을 파악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집중하는 것, 빛과 조명 등에 따라 강조되는 순간적인 인상 등을 위주로 정보를 받아들이지요. 그래서 그림이 사실적으로 보이기 위해서는 오히려 적당한 생략이 필요합니다. 한올한올 직물을 그려넣은 그림보다 대담한 붓질 몇 번으로 표현한 옷감이 더 사실적으로 보이는 것처럼요.이는 수많은 작품을 보고 예술과 과학에 관한 책들을 섭렵한 끝에 벨라스케스가 도달한 결론이었습니다. 이런 벨라스케스의 작품은 현실 그 자체보다 보는 이가 느끼는 ‘순간적인 인상’을 강조했던 200년 뒤 인상주의 후배들의 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인상주의의 선구자 마네가 벨라스케스를 ‘화가들의 화가’라고 부른 이유입니다.
벨라스케스는 끝없는 연습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증명해 나갔습니다. 예컨대 벨라스케스의 ‘파블로 데 바야돌리드’의 배경에는 벽이나 바닥 등 공간을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그 어떤 표식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델의 발은 공중에 붕 떠있는 게 아니라 단단한 바닥을 딛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인간의 눈은 인물과 배경에 동시에 초점을 맞출수 없기에, 배경을 흐릿하게 처리하더라도 모델을 잘만 그리면 여전히 사실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을 시험한 작품입니다. 이탈리아에서라면 이런 그림은 저평가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꼼꼼할수록 아름답다’는 상식에 어긋나는 작품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벨라스케스는 기존의 생각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벨라스케스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는 건, 궁정에 있는 왜소증 환자들을 그린 작품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유럽 궁정에서 왜소증 환자는 인간이라기보다 일종의 장식품 같은 존재였습니다. 궁정의 커다란 위엄을 빛내는 소품 역할이자, 어린 왕자나 공주들의 매를 대신 맞아주는 하인 역할이었지요. 궁정 사람들도 왜소증 환자들을 같은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벨라스케스는 왜소증 환자를 똑같은 인간으로 바라봤습니다. 그의 왜소증 환자 작품들에는 조롱도 동정도 없습니다. 대상에 대한 침착한 관찰과 이를 정확히 반영한 묘사가 있을 뿐입니다. 덕분에 그의 그림 속 왜소증 환자들은 다른 초상화 속 사람들, 심지어 왕족과 비교해도 뒤쳐지지 않는 존엄을 갖고 있습니다.
고귀한 존재가 되다
하지만 이렇게 전성기를 맞이한 벨라스케스의 작업량은 급격히 곤두박질칩니다. 벨라스케스의 현존하는 작품은 120여점. 하지만 1640년대부터 마지막 20년간 그린 작품은 40점 가량에 불과합니다. 벨라스케스가 초심을 잃었다거나, 무슨 문제가 있어서는 아니었습니다. 작품 수가 급격히 줄어든 건 오히려 그가 ‘너무 잘 나갔기 때문’이었습니다.벨라스케스가 섬겼던 왕 펠리페 4세는 사실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16살의 나이로 그가 물려받았던 유럽 최강의 제국은, 사실 속 빈 강정이었습니다. 오랜 종교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 전쟁 자금을 조달하며 악화된 산업 기반과 민심, 삐걱대는 행정 체계…. 펠리페 4세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기울어가는 ‘무적 함대’ 스페인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게다가 갑자기 사망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어린 나이에 급히 왕위에 오른 탓에, 그는 집권 초기부터 대신들의 견제에 시달렸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다섯 살 형인 벨라스케스는 예술 애호가인 펠리페 4세가 의지할 수 있는 좋은 친구이자 버팀목이 돼 줬습니다. 당연히 벨라스케스도 자신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는 왕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벨라스케스가 기꺼이 어린 왕자와 공주들의 좋은 놀이 상대이자 삼촌이 돼 준 것도 그래서였습니다.
그러던 중 1640년대 스페인 왕실에 여러 비극이 겹칩니다. 1644년 펠리페 4세가 사랑하던 왕비가 죽었고, 2년 뒤 장남이자 후계자였던 아들까지 세상을 떠난 겁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연달아 세상을 떠나자 펠리페 4세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이를 위로해준 게 친구이자 가족 같았던 벨라스케스였습니다. 초상화를 그리는 벨라스케스에게 어느날 왕은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나를 좀 도와주게나.”
이는 벨라스케스에게 좋은 기회였습니다. 이미 화가로서 벨라스케스의 기량과 명성은 더 올라갈 수 없을 정도로 최정상급이었습니다. 그에게 부족한 건 단 하나. 벨라스케스 자신과 그가 그린 작품, 나아가 화가 전체의 권위를 높일 수 있는 ‘고귀한 신분’이었습니다. 왕을 열심히 돕는다면 그도 티치아노나 루벤스, 반 다이크처럼 기사 작위를 받아 귀족이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는 벨라스케스가 젊은 시절부터 품었던 꿈의 실현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습니다. 20년지기 친구가 눈 앞에서 슬픔과 절망으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벨라스케스는 친구를 돕기로 결심합니다.붓을 놓은 벨라스케스는 궁정의 각종 일을 맡아 처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벨라스케스는 궁정을 청소하는 인력들을 도맡아 관리했고, 겨울철에는 궁전 바닥을 덮는 매트를 교체하거나 장작을 주문해 채워넣는 등 궁정 내 시시콜콜한 일들을 처리하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왕은 그의 궁정 내 직위를 계속해서 올려 줬고, 그럴수록 벨라스케스의 일은 더 바빠졌습니다.
이런 초고속 승진을 다른 사람들은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여론은 1652년 궁정의 ‘마스터 키’를 관리하는 고위 행정직을 뽑을 때도 드러났습니다. 왕의 추천으로 후보에 이름을 올린 벨라스케스를 제치고 다른 후보가 몰표를 받은 겁니다. 하지만 왕은 이런 결과를 무시했습니다. “그냥 벨라스케스로 임명해.” 얼마나 벨라스케스를 깊이 의지했는지 왕은 전쟁터에 나갈 때도 벨라스케스를 데리고 갔고, 그에게 미술품 수집과 궁전 장식 등을 맡겼으며, 이탈리아로 벨라스케스가 출장을 갔을 때도 빨리 돌아오라고 매일같이 재촉했습니다.그렇다고 벨라스케스가 그림을 잊은 건 아니었습니다. 1648~1650년 이탈리아에서 그는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과 ‘후안 데 파레하의 초상’ 등 그의 최고 걸작들을 그려냅니다. 벨라스케스의 작품들을 본 ‘예술의 본고장’ 로마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시에 나온 다른 그림은 모두 그림처럼 보였지만, 벨라스케스의 그림만큼은 진짜처럼 보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벨라스케스는 ‘고귀한 신분’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로비를 하고, 돈을 뿌리고, 왕에게 청원하고, 심사에서 떨어져도 다시 도전한 끝에 그는 예순 살이던 1659년 산티아고 기사단에 입단하는 데 성공합니다. 온 삶을 바쳐 ‘천한 직업이었던 화가도 위대한 작품을 남기고 고귀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쾌거였습니다. 그리고 평생의 소원을 이룬 벨라스케스는 1년 뒤 소임을 마쳤다는 듯 세상을 떠납니다.
전설이 되다
그의 이런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두 개의 걸작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는 1644~1648년경 그려진 ‘아라크네의 우화’. 그림에는 옷감을 만드는 여인들 뒤로 그리스·로마 신화 속 아라크네 이야기의 한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신화 속 아라크네는 베짜기의 달인이었는데, 인간의 몸으로 신(神)인 아테나에게 도전해 무승부를 거둔 후 신의 저주를 받아 거미가 됩니다. 비록 끝은 비극이었지만 한 때 신과 동급의 실력을 보여준 아라크네. 그처럼 인간의 예술엔 초월적 가치가 있다는 점, 벨라스케스 자신도 그림에서만큼은 신의 경지에 맞닿아 있다는 점을 작품에 표현했다는 것이 미술사가들의 해석입니다.‘시녀들’은 한 발 더 나아간 벨라스케스의 최고 걸작입니다. 화가들이 뽑은 미술사 최고의 명작이기도 합니다. 이때까지 수많은 예술가와 미술사학자들이 이 그림에 영향을 받았고, 제각기 다른 해석을 내놨습니다. 그림은 오늘날의 스냅사진과 비슷한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겠습니다.최근 나오는 해석들에 따르면 그림 속 상황은 이렇습니다. 어린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가 그림을 그리는 벨라스케스를 보러 왔다. 그래서 시종이 왼쪽에 무릎을 꿇고 물 한 잔을 대접했다. 그 순간 왕과 왕비가 방으로 조용히 들어선다(뒤쪽 거울에 왕과 왕비의 모습이 어렴풋이 비쳐 있음). 사람들은 하나둘씩 왕의 존재를 알아채기 시작했다. 벨라스케스도 왕이 들어온 걸 막 알아차리고 손을 멈춘 그 순간을 그림에 담았다는 겁니다. 요즘 상황에 비유하면, ‘사장님이 갑자기 사무실에 들어온 뒤 0.1초 후를 포착한 사진’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왕과 왕비, 공주와 화가를 동시에 그린 건 ‘예술이 그만큼 고귀하다’는 걸 뜻합니다. 벨라스케스 전부터 화가들은 그림에 화가와 왕을 함께 그려넣어 예술의 고귀함을 간접적으로 강조해 왔습니다. 여기에 더해, 이 독창적인 작품을 통해 벨라스케스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고귀함을 함께 표현했습니다.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순간, 심지어 벌어지지도 않았던 사건을 벨라스케스는 상상과 기술의 힘만으로 현실에 불러냈습니다. 사진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던 시대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놀랍습니다. 자신의 가슴팍에 그려넣은 기사단의 문장은 이런 ‘고귀함’의 완성입니다.
이런 걸작들을 떼놓더라도 벨라스케스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귀감을 줍니다. 그는 평생에 걸쳐 자신의 재주를 갈고닦았고, 최고의 자리에서도 결코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루벤스에게 좌절을 맛본 뒤에도 곧바로 일어나 노력에 더욱 박차를 가했습니다. 또 물질적인 만족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믿는 가치, 즉 예술과 예술가의 고귀함을 증명하기 위해 평생을 싸웠습니다. 그리고 끈기와 집념으로 이를 결국 이뤄내 예술의 역사를 바꿨습니다. 그러면서도 벨라스케스는 주변을 살피는 데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개인의 존엄한 내면을 담아낸 왜소증 환자의 초상화들이 이를 증명합니다.
벨라스케스의 작품들은 4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오늘날까지 수많은 관객에게 감탄과 감동을 선사합니다. 그 배경엔 그의 삶과 철학이 있습니다. 자신이 본 것을 그리는 게 미술이라면, 캔버스에 그려진 결과물은 곧 화가 자신이 세상을 보는 시각을 반영합니다. 그 시각에는 한 인간이 어떤 내면을 갖고 있고, 어떤 생각을 하며 인생을 살아왔는지가 녹아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미술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벨라스케스의 삶은 탁월한 작품이었습니다.
날씨가 맑고 따뜻합니다. 작품 같은 주말 보내세요.**이번 기사는 Velázquez: Painter and Courtier(Jonathan Brown 지음), Collected Writings on Velázquez(Jonathan Brown 지음), Diego Velázquez and His Times(Karl Justi 지음), 디에고 벨라스케스(노르베르트 볼프 지음, 전예완 옮김, 마로니에북스-Taschen 펴냄)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5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