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몰한 백악관과 뒤집힌 성조기…뉴욕 휘트니 비엔날레가 던진 질문

[arte] 이한빛의 아메리칸 아트 살롱

제81회 휘트니 비엔날레
키얀 윌리엄스(Kiyan Williams)의 Ruins of Empire Ⅱ or The Earth Swallows the Master’s House, 2024. 사진=이한빛
키얀 윌리엄스의 자유의 상(Statue of Freedom, Masha P. Johnson), 2024. 사진=이한빛
거꾸로 매달린 성조기. 백악관의 입구가 침몰합니다. 검은 흙으로 지어진 파사드(건물 앞 면)는 그 자체만으로도 위태위태한데, 심지어 기울어져 있습니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죠. 트렌스젠더 활동가인 마샤 존슨의 조각상은 침몰하는 백악관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미국이 망한다(망하고 있다)’는 간단한 명제가 허드슨 강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이 내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타고 퍼집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가, 아니면 정말 모르는가”하고요. ‘실제보다 더 나은’(Even Better Than the Real Thing) 것은 과연 진짜 나은 것일까요 아니면 더 악랄한 거짓말일까요. 제81회 휘트니 비엔날레가 던진 물음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현대미술제, 한국과의 인연은

지난 3월 20일 개막, 오는 8월 11일까지 열리는 휘트니 비엔날레는 올해로 81회를 맞은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격년으로 열리는 미술제입니다. 지난 1932년 시작해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현대미술제로 꼽힙니다. 또 한국과의 인연도 빼놓을 수 없는데, 휘트니 비엔날레가 미국을 벗어나 유일하게 열렸던 곳이 바로 1993년 과천입니다. 배경에는 백남준이 있었습니다. 당시 휘트니 비엔날레 관장인 데이비드 로스는 첫 해외 전시로 일본을 점 찍은 상황이었는데, 백남준이 주제인 ‘경계선’(Borderline)에 더 적합한 곳이 한국, 서울이라며 적극 밀어붙였죠.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결국 휘트니 비엔날레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열렸습니다. 단 한 번뿐인 외유였습니다.

올해 휘트니 비엔날레는 미술관 큐레이터인 크리시 일즈(Chrissie Iles)와 멕 온리(Meg Onli)가 디렉터를 맡았습니다. 주제인 ‘실제보다 더 나은’은 ‘현존’이라는 개념을 고민합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시대와 공간의 변화를 살펴봅니다. 점점 더 일상을 파고드는 인공지능, 낙태 문제로 대표되는 개인과 사회의 신체 주도권 다툼, 늘 반쯤 온라인에 접속된 상황에서 발생하는 유동적 정체성, 21세기에도 이어지는 영토전쟁, 환경문제 등 ‘변곡점’에 달한 우리 현재를 71명의 예술가들이 돌아봅니다.

71명의 예술가가 바라본 현재, 그 불안한 자화상

비엔날레를 준비하는 2022년부터 2024년 사이, 미국은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첫 손에 꼽히는 건 미국 대법원에서는 여성의 신체 주도권을 인정하는 1973년 연방대법관들이 내린 ‘로 대 웨이드’(Roe vs Wade) 판결이 뒤집힌 케이스입니다. 낙태권 보장이 사생활 권리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세대별로, 주별로 찬반양론이 불붙은 가운데 일부 주에서는 낙태를 인정하지 않아, 생명이 위험한 상황에 처해 꼭 해야 하는 여성들마저도 수술을 위해 주를 건너 이동하는 황당한 상황도 펼쳐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번 대선에서도 주요 이슈입니다. 프로 라이프(pro life·낙태 반대)인 공화당과 프로 초이스(pro choice·여성의 선택권 존중)인 민주당 덕에 세대 간 이슈로 비화하기도 했습니다.
Carmen Winant, The last safe abortion, 2023. 사진=이한빛
카르멘 위난트(Carmen Winant)는 이 같은 급작스런 백래쉬(Backlash·반동)에 조용하고 담담한 분노를 표출합니다. 벽 전체를 낙태 클리닉 의사와 자원봉사자들의 사진 2500여장으로 채운 것이죠.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던 여성들의 수많은 사연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대신, 현장에서 촬영한 ‘현재’를 가져와 관객에게 펼쳐 놓습니다. 빈칸을 짐작하는 것은 관객의 몫입니다.
Eddie Rodolfo Aparicio, White Dove Let Us Fly, 2024. 사진=이한빛
현재 미국에서 가장 심각하게 다뤄지는 이슈는 ‘이민’입니다. 미국이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이나, 이곳에 ‘난민’ 이슈와 저렴한 노동력을 원하는 경제적 수요가 맞물리며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는 양상입니다. 에디 로돌포 아파라시오(Eddie Rodolfo Aparicio)는 거대한 호박(나무 진액)조각상을 선보입니다. 1950년대와 60년대 남 캘리포니아에서 많이 심었던 나무에서 채취한 것인데, 도시 조경수로 많이 쓰였던 나무입니다. 그러나 나무가 점점 자라 보도를 침해하자 로스앤젤레스시는 나무를 제거하기 시작합니다. 작가는 필요하다고 해서 마구잡이로 심었다가 힘없이 뽑혀 나간 나무에 ‘노동’이민자를 비유합니다. 1950년대 이후 미국에 일하러 온 수많은 남미 출신 노동자들이 그 쓰임을 다하자 추방당했던 아이젠하워 시대의 이민정책에요. 호박 안에는 도시에서 흔히 보이는 일상적 물건 외에도 엘살바도르 군부 대량 학살과 관련한 문서가 숨어있습니다. 호박은 아직 완벽하게 굳은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그 모양이 틀어집니다. 작가는 기억과 트라우마가 신체에 흔적을 남기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인종, 성별, 능력에서 소외된 이들은 그동안 어떻게 그려졌나

비엔날레는 전반적으로 ‘비주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원래 미국 땅의 주인이었으나 주변부로 밀려나게 된 네이티브 아메리칸,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 이성 중심 사회에서 퀴어, 전쟁으로 난민이 된 사람들과 억류된 사람들 그리고 능력이 없어 잉여로 취급받는 이들에 초점을 맞춥니다. ‘비주류’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가장자리 끝(fringe)에 위치한 사람들입니다.
Maya Ruznic, Deep calls to deep, 2023. 사진=이한빛
‘그래도 나는 내가 섹시하다고 생각한다’는 나이 든 퀴어의 고백(샤론 헤이즈, Ricerche: four), 어릴적 난민캠프에서 보낸 기억을 시각화한 마야 루즈닉(Maya Ruznic)의 페인팅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마냥 부서질 것처럼 유약하게, 존재감 없이 묘사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바호족 예술가인 데미안 디네야치(Demian DineYazhi)는 허드슨강을 향하는 통유리창 앞에 설치된 네온사인 작업으로 ‘종말/대량 학살을 멈추라’는 원주민 저항운동의 대표적 메시지를 선보입니다. 네온 텍스트 사이 일부 알파벳의 전기가 꺼져 있는데, 이를 모으면 ‘FREE PALESTINE’(프리 팔레스타인)이 완성됩니다. 친(親)이스라엘 시위대들의 구호인데, 정치적 이슈의 공론장으로도 활용되는 현대미술의 단면이 가감 없이 드러납니다.
Demian DineYazhi, We must stop imaging apocalypse/genocide + we must imagine libration, 2024. 원주민 저항운동의 메시지 속, 팔레스타인을 해방하라(Free Palestine)는 친 이스라엘 메시지가 숨었다. 사진=이한빛
그렇습니다. 동시대 미술은 정치의 최첨단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딱히 숨기거나 가리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대놓고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도 않지요. 모순처럼 들리지만 때론 모호하고 아스라한 시각 언어가 때로는 더 강력하니까요. 사진작가이자 영화감독인 다이앤 세버린 응우옌(Diane Severin Nguyen)은 난징 대학살을 주제로 하는 영화에 출연하는 젊은 여배우의 내적 갈등을 포착합니다. ‘그녀의 시간(아이리스 버전)’(In Her Time(Iris's Version))은 20세기 최고 잔혹 행위로 꼽히는 난징 대학살을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그 안에서 연기해야 하는 여성을 통해 신념의 위험성, (기록된) 역사의 편향성과 정치성, 사회적 합의로 도출한 ‘토대’라는 것의 불안함을 지적합니다.

2024 휘트니 비엔날레, 우리시대 불협화음을 집합시키다

Suzanne Jackson, Deepest ocean, what we do not know, we must see? 2021, 사진=이한빛
Holly Herndon & Mat Dryhurst, xhairymutantx Embedding Study 2, 2024. AI로 형성한 캐릭터 이미지, 사진=이한빛
올해 주제인 ‘실제보다 더 나은’은 사실 현실 그 자체에 더 집중합니다. AI나 가상현실이 우리 현실을 기반으로 만들어졌기에 그를 살펴보기 위해선 “도대체 ‘현실’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먼저 답해야 하니까요. 아무리 엉망진창이고, 쉽게 부서지고, 복잡다단하고, 명확하지 않으며, 망할 것 같은 현실이라고 할지라도 말이죠. 멕 온리 큐레이터는 도록에 “이번 비엔날레를 기획하며 크리시 큐레이터와 저는 1990년대 문화전쟁만큼이나 첨예한 정치적 순간들을 고려해야 했다.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작업이 스테레오타입으로 단순화하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현시대가 명징한 하나의 의미가 아니니 동시대를 반영하는 작가들의 작업도 당연히 그러합니다. 흑백이 아닌 흑백 사이의 다양한 회색이 존재하고, 심지어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 색도 있다는 뜻입니다. 현지 언론에서 ‘불협화음의 집합’이라고 평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휘트니 미술관은 그 시작부터 실험적인 동시대 예술을 받아들이고 키우는 플랫폼으로 출발했습니다. 지금은 구겐하임, 뉴욕현대미술관(MoMA), 메트로폴리탄박물관과 함께 뉴욕의 4대 미술관으로 통하지만, 1931년 설립 당시엔 미술관을 세우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철도왕으로 불린 코넬리어스 밴더빌트의 손녀이자 미술가였던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는 자신이 수집한 미술품 700여점을 기증하려 했으나, ‘검증되지 않은 젊은 미술가의 작품들’이라는 이유로 기증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이에 미술관을 새로 지은 것입니다. 휘트니비엔날레는 이처럼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로 시작했습니다. 앞선 2년간 발표된 미국 현대미술을 주로 소개했죠. 1937년부터는 매년 개최하다 1973년부터는 다시 비엔날레 형태로 돌아옵니다. 백남준을 비롯해 제니 홀저, 에드워드 호퍼, 마크 브레드포드, 로이 리히텐슈타인, 글렌 리곤, 신디 셔먼 등 3600여명의 작가가 이곳을 거쳐 갔습니다. 베네치아 비엔날레가 전 세계 미술을 다룬다면, 휘트니는 미국 미술을 통해 세계를 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한빛 칼럼니스트
휘트니 비엔날레 전경, 사진=이한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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