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사 회장의 '이중신분 사기' 잡은 초임검사…"저도 황당했죠"

'중국동포 위장 사기' 권경만 기소한 서울중앙지검 김민수 검사 인터뷰
"터무니없다 치부할 수 없었다…이름 탓에 보이스피싱 오해받기도"
"언론사 회장이 신분 위조 사기꾼이라니, 황당무계하긴 했죠"
서울중앙지검 형사3부 김민수(32·변호사시험 9회) 검사는 지난 23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사건을 처음 맡은 날을 떠올리며 말했다. 올해 1월 김 검사가 받은 진정서에는 '권영만 경인방송 회장이 중국동포 A씨 행세를 하며 사기를 저질렀으니 두 사람이 동일인인지 밝혀달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증거자료 하나 없는 진정이었지만, 검찰 수사 끝에 이는 사실로 드러났다.

권 회장은 2011년 위조한 중국동포 신분으로 사기 행각을 벌인 혐의로 지난 9일 구속기소됐다. 공소시효를 불과 나흘 앞두고 범행 전모가 드러난 배경에는 사소한 단서도 허투루 넘기지 않은 초임 검사의 집요한 수사가 있었다.

김 검사는 진정 내용을 접한 뒤 "터무니없다고만 치부할 수 없다"는 생각에 A씨 이름으로 피의자 입건된 사건 500여건을 검색해봤다고 한다.

이 중 권 회장과 비슷한 연배의 사람을 추려 3건의 사기 사건을 찾았다. 모두 피의자가 국외 도피해 기소중지된 사건들이었다.

사건 기록에 따르면 중국동포 A씨는 2010년 8월 한국에 들어왔는데, 같은 달 대기업과 이름이 유사한 '현대도시개발'이라는 법인의 대표이사로 등재됐다.

스스로를 건설사 대표라고 소개하며 명함을 뿌리고 다닌 정황도 있었다. 진정 내용이 사실일 수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김 검사는 "한국에 입국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중국 동포가 이런 범행을 저지르는 게 상식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수사 과정은 평탄하지 않았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권 회장의 최근 사진과 A씨 여권 사진을 비교해달라고 의뢰했지만, A씨 사진이 오래 된 데다 화질이 좋지 않아 정밀 감정이 어려울 수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난관에 부딪히나 했는데 지난달 6일 국과수에서 사진 속 권 회장과 A씨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회신이 왔다.

김 검사는 국과수 회신에 "당혹스러웠다"고 털어놨다.

권 회장이 A씨가 맞을 경우 공소시효는 한 달여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앞서 발견한 3건의 사기 사건 중 1건은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상황이었다.

그날부터 권 회장이 A씨라는 증거를 찾기 위한 야근과 주말 출근이 계속됐다.

사건 관계자들에게 조사 협조를 받으려 연락했을 때는 이름 탓에 보이스피싱범으로 의심받기도 했다.

김 검사는 "안 그래도 '서울중앙지검 김민수 검사'가 보이스피싱의 대명사인데, 이름을 말하고 13년 전 사건 이야기를 하니까 보이스피싱이라고 생각하고 끊어버린 사람도 있었다"며 웃었다.

우여곡절 끝에 2011년 A씨를 만난 적 있는 여러 사람으로부터 "최근 영상 속 권 회장과 A씨가 얼굴만이 아니라 목소리 높낮이, 말투 등도 비슷하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수사에 확신이 든 김 검사는 도주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압수수색과 동시에 권 회장을 체포했다.
체포된 권 회장은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주거지에서 확보한 A씨 명의 여권을 들이밀어도 '나는 모른다'는 말만 반복했다.

김 검사는 "초임검사라 그런가, 처음에는 핵심 증거물을 들이밀면 자백하는 피의자 모습을 내심 그렸는데 현실은 달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권 회장은 법원에 신청한 구속적부심이 기각된 뒤에야 A씨 신분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시인했다.

그는 지난 3일 회장직에서 사임했다.

김 검사는 "피해자들에게 기소 사실을 알리고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장 보람찼다"고 했다.

피해자들은 처음 수사를 시작할 때만 해도 '13년 전 일이라 잊고 살았는데 왜 다시 상처를 헤집느냐'며 불신의 눈초리를 보냈다. 앞으로 어떤 검사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김 검사는 "납득할 수 있는 결정을 하는 검사가 되고 싶다"며 "갈등을 다루는 직업이라 누군가는 불만을 품을 결정을 하게 될 텐데, 모두의 마음에 들지는 못하더라도 내 판단의 이유가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갔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