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사 새옹지마…오치균, 자신의 미술관 휘감은 유리 조각으로 '눈부신 부활'

'감' '뉴욕' '사북' 연작으로 떠오른 블루칩 작가
15년간 사용한 작업실 미술관으로 대변신
'오치균의 신작' 유리 조각 및 대표작 선보여
오치균미술관 내부 전경. 작가의 대표 연작 '감'과 새롭게 선보일 설치 작업이 놓여 있다. /오치균미술관 제공
작품이 불티나게 팔리는 '부자 화가', 붓이 아닌 손가락으로 그린 '지두화'.

스타 작가 오치균(67)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두 단어다. 컬렉터 사이에서 그의 감나무 연작은 한때 필수 아이템으로 인기를 끌었다.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6억원 넘는 가격에 낙찰된 '사북의 겨울'(1998)처럼 '억 소리' 나는 작품이 대다수였다. 2000년대 후반 이우환, 김종학 화백과 더불어 생존 작가 최고 낙찰률을 자랑하며 미술시장을 움직였다.화려한 이력에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은 세 번째 특징이 있다. 인생의 여러 슬럼프에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다는 점이다. 침체기는 최근에도 찾아왔다. 2010년대 단색화 열풍이 불며 구상 작업의 인기가 상대적으로 식었고, 작가 본인도 40여년간 계속한 지두화에 매너리즘을 느꼈다. 2017년 서울 인사동 노화랑 개인전을 끝으로 세상과 담쌓고 작업실에 틀어박힌 그였다.
오치균 작가의 신작 'Abstract' /오치균미술관 제공
오치균 작가가 7년 만에 화단에 복귀했다. 이때까지 전혀 시도한 적 없던 신작 유리 입체조형과 함께다. 작가가 부활한 장소는 지난 15년간 그의 작업실이었던 곳. '화가 인생 2막'을 선언하듯 도전적인 신작과 지난 대표작들을 대거 선보이는 회고전 '오치균의 신작(Oh Chigyun's New Works)'이 지난 3일 서울 압구정동에 개관한 오치균 미술관에서 열렸다.

오랜 은둔 생활에 입이 근질근질했던 걸까. 한국경제신문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봇물 터진 듯 신작에 대한 설명을 쏟아냈다."2017년 개인전 이후로도 페인팅을 2~3년 계속했습니다. 같은 작업을 반복하다 보니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고 지루하더라고요. 어느 날 나이프에 묻은 물감 덩어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물감도 오브제가 될 수 있구나'란 생각이 들자 유리, 돌 등 다른 재료로 시야가 넓어졌어요. 깨지면 깨진 대로 아름다운 유리의 매력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푹 빠졌죠."

처절한 어둠에서 피어난 대표작들

슬럼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1956년 충남 대덕군 산골에서 태어난 작가는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서 자랐다. 나무에 매달린 감을 보고 입맛을 다시며 주린 배를 달래곤 했다. 작가를 대표하는 감나무 시리즈는 이때의 기억을 바탕으로 탄생했다. 얼핏 보면 아름다운 정물화 같지만, 제멋대로 뻗친 나뭇가지의 구도가 도발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다.
작업실에 있는 오치균 작가의 모습. /오치균미술관 제공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그는 20대 후반인 1986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뉴욕시립대에서 공부를 마치고 5년간 미국 미술시장에 도전했지만, 받아든 성적표는 초라했다. '뉴욕' 연작의 초기 단계로 평가받는 이때의 작품들엔 미래에 대한 불안과 외로움의 정서가 역력하다.전시장 입구에 걸린 '소외된 사람들'(1987)도 그중 하나다. 뉴욕 지하철역 풍경을 어두운 톤으로 담은 작품이다. 화면 가운데 희미하게 꺼져가는 불빛은 작가가 관찰한 노숙자의 형상이다. 작가의 아내이자 화가인 이명순 오치균 미술관장은 "죽음과 소멸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반영된 처절한 작품"이라며 "지금까지도 작가가 본인 작품 중 최고로 꼽는다"고 설명했다.

한국에 돌아오자 작가의 삶에도 '볕들 날'이 찾아왔다. 블루칩 작가로 주목받으며 상업적 성공을 거둔 것이다. 유학 시절의 아쉬움을 달래고자 다시 미국을 찾은 작가는 더 이상 뉴욕의 지하를 그리지 않았다. 대신 고층 빌딩에서 바라본 스카이라인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씀씀이도 커졌다. 앤티크 소품들을 수집하고, 휴가차 방문한 뉴멕시코주 산타페이 별장을 단번에 사들일 정도였다.
오치균 미술관 개관 기념전 'Oh Chigyun's New Works' 전시 전경 /안시욱 기자
화업이 절정에 이르렀다고 평가받던 시기다. 100호가 넘는 대형 캔버스에 물감을 아낌없이 덜어내 찍어 발랐다. 작가의 산타페이 연작에선 물감의 두께감이 특히 돋보인다. 그동안 어둡고 음침한 풍경을 주로 묘사해온 까닭에 밝고 화사한 산타페이의 분위기를 화폭에 담는 데까지 여러 번 수정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화려한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그한테 또 한 번 침체기가 찾아왔다. IMF 외환위기 여파로 작품값이 떨어졌고, 그를 찾는 화랑도 줄었다. 헛헛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찾은 강원도 정선 사북읍의 탄광촌 풍경에서 동질감을 느꼈다. 지금의 강원랜드가 들어서기 직전 텅 빈 마을의 전경, 콘크리트 사이에 피어난 민들레 등을 캔버스에 옮겼다. 사북 시리즈는 현재 작가를 대표하는 연작 중 하나다.

침잠과 숙고의 시간은 늘 새로운 작품의 토양이 됐다. 3차원 유리 조형작업에 도전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유리 조형작업은 기성 유리제품을 깨는 것으로터 시작된다. 깨진 유리는 소멸과 취약성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그 형태를 변경하고 연결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연결과 단절, 생성과 소멸이 공존하는 것. 새옹지마를 겪은 67세의 작가가 깨달은 인생의 진리이기도 하다.
오치균 작가의 신작 'Bluetooth' /오치균미술관 제공
베토벤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1층 전시장엔 꽃과 나비, 부처 등의 모습을 유리로 옮긴 작품들이 들어섰다.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담았어요. 장미는 사랑, 나비는 자유의 상징이죠. 장미꽃이 자주 등장하는 걸 보니, 저는 사랑이 그리운 사람인가 보네요. 하하."

작품 세계 한눈에…15년 흔적 깃든 오치균 미술관

이번에 개관한 오치균 미술관은 원래 작가가 작업실로 사용하던 공간이다.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까지 총 595㎡(180평) 규모다. 1980년대 초 유치원으로 사용기도 한 건물을 2008년 작가가 인수했다. 서울 강남 한복판 건물 전체를 자기 이름을 건 미술관으로 개방하는 건 흔치 않은 일. '부자 화가'란 별명에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지난 7년간 밤낮으로 작품을 만들다 보니 이 많은 유리 조각을 도저히 보관할 곳이 없었어요. 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이곳을 시민과 나누고자 미술관으로 리모델링했습니다."
오치균미술관 외부 전경. /오치균미술관 제공
건물 곳곳엔 그의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는 흔적이 마련됐다. 작가와 오래 알고 지낸 대학 후배들이 머리를 맞댄 결과다. 건축가 홍경모가 새로운 공간을 설계했고, 디스플레이는 이정섭, 시공은 곽현정이 각각 맡았다.

1층 구석엔 유리 파편이 널린 작가의 작업실을 그대로 보존했다. 보일러 배관이 고스란히 남은 지하엔 그의 감나무 그림과 신작 감나무 조각이 고요히 마주 보고 있다. 이 밖에도 회색 시멘트를 켜켜이 올린 외벽에서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인 지두화 작업 방식을, 최소한으로 남긴 창문에서 그의 은둔자적 성향을 표현했다.
오치균 미술관 2층에서 바라본 1층 작가 작업실 전경 /안시욱 기자
오치균 미술관 개관을 기념해 열린 이번 전시는 총 3부에 걸쳐 진행된다. 9월 29일까지 열리는 1부 유리 작품 전시를 시작으로 2부에선 돌 조각, 3부에는 아크릴 물감을 활용한 입체 조형 등 최신 작업을 선보일 예정이다.

개관전을 마친 뒤 오치균 미술관은 신진 작가들의 작업을 소개하는 공간으로 활용될 계획이다. 미술관 측은 예술가들을 위한 후원 사업도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제가 혼자 이 미술관에 계속 있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젊은 작가들한테도 기회를 줘야죠." 다시 한 번 화려한 부활을 준비하는 작가의 눈빛이 소년처럼 빛났다.입장료는 성인 1만4000원, 청소년 1만1000원.
오치균미술관 개관 기념전 'Oh Chigyun's New Works' 전시 전경 /안시욱 기자
안시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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