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 레터] 요상한 숙제

[한경ESG] Editor's Letter


기업에 숙제가 예고되었습니다. 지난 4월 30일 우리나라의 지속가능성 공시기준 공개 초안이 발표된 겁니다. 그런데 참 ‘요상한 숙제’입니다. 숙제 범위는 정해진 것 같은데, 적용 대상자와 시행 시기가 아직 미정입니다. 단지 올 하반기에 국내 기준 확정안을 발표하겠다고 밝혔을 뿐입니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합니다. 일단 숙제가 예고되었으니 준비는 해야 하는데, ‘누구에게’와 ‘언제부터’가 미정이라 숙제에 대한 ‘의무감’보다는 ‘안도감’이 앞섭니다. 마치 나와는 상관없는 숙제일 것 같은 착각마저 듭니다.

하지만 ESG 공시의무 강화는 글로벌 스탠더드로 굳혀지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미룰 수 있는 숙제가 아니라는 거죠. 이미 글로벌 규제 압력을 강하게 받는 대기업들은 자발적으로 지속가능성 정보를 공개하고 있기도 합니다. 대한상공회의소 공급망ESG지원센터는 국내 공급망 내 협력사 1278곳을 대상으로 ESG 경영 실사를 실시, 지난 4월 그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지원센터는 경영 수준을 고위험·중위험·저위험으로 구분해 진단을 실시했는데, 국내 중소·중견기업은 환경과 지배구조 부문에서 고위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고 합니다. 글로벌 규제 압력을 직접 체감하는 대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내 중견·중소기업의 경우 ESG 경영이 사실상 사각지대에 방치되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누군가는 “최근 ESG에 대한 주목도가 한국은 물론 미국과 유럽연합(EU)에서도 예전만 못 하다”고 투덜대기도 합니다. 하지만 ESG의 출발은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평가하고, 이와 관련한 위험과 기회를 투자에 반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앞으로도 ‘ESG’라는 정보를 매개로 한 자본의 흐름은 더욱 거세질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관측입니다. EU가 권역 내 일정 수준의 매출액을 초과하는 비EU 기업에 대해 연결 기준으로 공시의무를 부여할 2029년이 국내 기업엔 중요한 변곡점이 될 수 있습니다.

요상한 숙제를 받아든 기업에 선택지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요행을 바라며 숙제를 미루든가, 아니면 깔끔하게 숙제를 마친 뒤 자신 있게 미래를 기다리든가. 선택지는 비교적 간결하지만, 그로 인한 기업의 미래는 전혀 다른 모습일 것입니다. 〈한경ESG〉가 5월호 커버 스토리 ‘ESG 공시 강화, 쟁점과 대안은’을 참고서처럼 크게 펼쳐 보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글 한용섭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