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나잇값이 무겁다

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사진과 기사 내용은 무관./사진=게티이미지뱅크
손주가 태어난 이듬해 아버지가 환갑을 맞았다. 아버지가 바라던 대로 결혼해 첫 아이를 낳은 때라 회갑 잔치를 잘해드리고 싶었다. 동생들과 협의해 시내 호텔에 식장을 예약했다. 준비가 거의 끝나 아버지를 찾아뵙고 환갑잔치 준비상황을 처음으로 알려드리며 초대할 지인들을 말씀해달라고 했다. 잠자코 듣던 아버지가 눈시울을 적시며 “그만두라”라고 했다.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말씀드리자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냐”고 화냈다. 머뭇대자 “당장 예약 취소하라”라고 해 그 자리서 바로 취소했다. 영문 몰라 하는 내게 한참 지나 아버지는 “고맙다”고 한 뒤 “보잘것없는 삶이어서”라는 이유를 댔다. 아버지는 회갑연에 으레 밝히는 “약력이라고 소개할 게 없어서다”라고 덧붙였다.

아버지는 “나이는 ‘가지다’가 아니라 ‘먹는다’고 쓴다. 오래전부터 그렇게 써왔으니 선인들의 비유와 경계가 놀랍고 두렵다”고 했다. 이어 아버지는 나이를 ‘먹는다’고 비유한 이유를 이렇게 유추해 설명했다. 첫째 나이가 사람의 생명 에너지 소비와 관련 있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사람은 성장하고 발달하며, 이 과정에서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그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음식을 먹는다. 둘째 나이가 사람의 경험 축적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경험은 마치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이 지식과 정보를 흡수하는 과정이다. 마지막으로 시간을 소모했다는 뜻이다. 시간을 먹었다는 얘기다.아버지는 “‘먹는다’가 문제가 아니라 먹으면 그에 상응한 결과가 없어서다”라며 “음식은 먹은 만큼 소화해 성장하며 잔여물은 배설한다”라고 했다. 소화불량이거나 토해내거나 해서 먹은 나이만큼의 결과가 없음을 탓했다. “개나 돼지 등 여타 짐승들도 먹은 값을 한다”며 아버지는 “헛살았다”고 표현하며 심하게 자책했다. 아버지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게 나잇값이다. 나잇값이 무겁다. 먹은 만큼은 성장했어야 나잇값을 하는 거다. 손주까지 태어났으니 하늘과 조상은 물론이려니와 손주에게도 부끄러운 삶이 됐다”라고 했다. “2남 4녀 자식을 낳고 불편한 몸을 이끌고도 여러 주목받고 박수받을만한 일을 해온 지난 삶의 역정(歷程)은 같은 길을 걷는 다른 이들에게도 귀감이 될 수 있다”는 내 말에 “귀에 거슬린다”며 “나이를 헛먹었다”고 다시 한탄했다.

아버지는 “나이 60세의 비유적인 표현이 공자가 말한 이순(耳順)이다”라며 ‘귀가 순해진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예순에는 남의 말을 듣기만 하면 곧 그 이치를 깨달아 이해하게 되었고[六十而耳順]”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아버지는 “귀가 순해져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말을 객관적으로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바로 60세, 즉 이순이다”라며 “네 말이 거슬리는 걸 보니 아직 환갑잔치할 나이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여지없이 그날도 고사성어 ‘비육지탄[髀肉之嘆]’을 인용했다. 보람 있는 일을 하지 못하고 헛되이 세월만 보내는 것을 한탄함을 비유한 말이다. 할 일이 없어 가만히 놀고먹기 때문에 넓적다리에 살만 찐 것을 한탄한다는 뜻이다. 중국 삼국시대 유비(劉備)가 한 말이다. 신야(新野)의 작은 성에서 4년간 할 일 없이 지내던 유비가 유표(劉表)의 초대로 연회에 참석했을 때 변소에 갔다가 자기 넓적다리에 유난히 살이 찐 것을 보게 되었다. 순간 그는 슬픔에 잠겨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그 눈물 자국을 본 유표가 연유를 묻자 대답한 말에서 비롯했다. “나는 언제나 몸이 말안장을 떠나지 않아 넓적다리에 살이 붙을 겨를이 없었는데 요즈음은 말 타는 일이 없어 넓적다리에 다시 살이 붙었습니다. 세월은 사정없이 달려서 머지않아 늙음이 닥쳐올 텐데 아무런 공업(功業)도 이룬 것이 없어 그것을 슬퍼하였던 것입니다.”그때 아버지의 고심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가족이 모여 점심을 함께하는 것으로 회갑연은 마쳤다. 아버지는 몇 술 뜨지 않았다. 환갑 지나 아버지는 바로 “나잇값을 해야 한다. 삼국지(三國志)를 새로 써야 한다”며 묵혀뒀던 집필에 들어갔다. 이젠 내 나이가 칠순을 넘었다. 아버지가 육순에 하신 말씀들이 칠순이 되어서야 새롭게 떠오른다. 손주들에게 일찍이 깨우치도록 물려줄 인성은 뭘까? 그게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감이다. 아버지가 울음 섞어 깨우쳐주려고 한 ‘나잇값’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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