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 외친 어느 서정시인의 시선집

[arte] 김기태의 처음 책 이야기

김지하 시선집 창작과비평사, 1982년 6월 5일 발행
김지하(金芝河) 시인이 2022년 5월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시인의 본명은 김영일(金英一), 주로 지하에서 활동한다는 뜻을 담아 필명을 ‘지하’로 지었다고 한다. 필명에 걸맞게 시인은 1970년대 독재정권에 맹렬하게 저항한 지식인이었다.
시인 김지하. 사진=뉴스1
1941년 2월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으며, 1954년 강원도 원주로 이주하면서 원주중학교에 편입했다. 1959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한 이듬해 4·19혁명에 참여했다. 당시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남쪽 대표로 활동했으며, 1964년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한 ‘서울대 6·3 한일 굴욕회담 반대 학생총연합회’ 소속으로 활동하다 체포돼 4개월간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한때 수배를 피해 항만 인부나 광부로 일하며 도피생활을 이어갔다.1969년 11월 문예지 <시인>에 '황톳길' '비' '녹두꽃' 등의 시를 발표하며 공식 등단했다. 당시 저항시인으로 유명했던 김지하 시인은 유신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의 상징이자 민족문학 진영의 대표 문인으로 알려졌다.

특히 1970년 월간지 <사상계>에 '오적(五賊)'을 발표해 구속된 일은 유명한 일화가 됐다.

시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볼기를 맞은 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것다.이렇게 시작하는 '오적'은 300행 정도의 풍자시로 독재 치하에서 부정하게 부(富)를 축적한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에 빗댔는데, 이 작품으로 인해 김지하 시인을 비롯해 사상계 대표와 편집장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던 것.

김지하는 같은 해 희곡 '나폴레옹 꼬냑' '구리 이순신'을 집필했고, 대표적인 평론인 '풍자냐 자살이냐'를 발표했다. 그해 12월에는 첫 시집 <황토>를 펴냈다. 1972년 4월 권력의 횡포와 민심의 향방을 그린 담시(譚詩) '비어(蜚語)'를 발표해서 다시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되기도 했다. 이어 1974년에는 민청학련 사건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잡혀 들어가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가 1980년 형 집행정지로 석방됐다. 2013년 민청학련 사건 재심에서 39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으며, 이어 2014년 법원은 김지하 시인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다며 15억 원의 국가배상 판결을 내렸다.

김지하 시인은 또한 인권운동가이자 문인으로도 국내외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1975년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 로터스(Lotus) 특별상, 1981년 국제시인회 위대한 시인상, 브루노 크라이스키[1] 인권상, 2002년 제14회 정지용문학상, 제10회 대산문학상, 제17회 만해문학상, 2003년 제11회 공초문학상, 2005년 제10회 시와시학상 작품상, 2006년 제10회 만해대상, 2011년 제2회 민세상(民世賞)[2] 등을 수상했으며, 노벨문학상·노벨평화상 후보에도 올랐다.이처럼 국내외에서 주목받은 시인의 대표작은 대표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제목의 저항시가 아닐까 싶다. 1980년대를 대학가에서 보낸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읊조렸을 법한 시 작품이자, 민주화를 향한 열망이 끓어 넘쳤던 시위 현장 어디서든 한목소리로 목청껏 부르곤 했던 민중가요의 가사이기도 했다. 초판 1쇄본에 실린 시를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기실 민주화 시위 현장에서 널리 불리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민중가요로서의 ‘타는 목마름으로’는 김지하의 시 '타는 목마름으로'를 원작으로 1980년대 초·중반 당시 연세대 학생이던 ‘이성연’이 작곡했는데, 대학가를 중심으로 널리 퍼지면서 민중가요로 자리를 잡았다. 유신독재 정권의 긴급조치 시대를 맞아 저항의 뜻으로 썼던 원작시를 바탕으로 “오직 한 가닥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의 중반부와 ‘타는 목마름으로’로 이어지는 후반의 고음 절정부 등 구절구절을 잘 살리는 선율 덕분에 수용자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원래 김지하 시인의 원작시는 1970년대 후반 내내 출간조차 되지 못한 채 필사의 형태로만 전파되다가, 1982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되자마자 판매금지 조치를 당하는 등 오랫동안 금지된 반독재 투쟁의 상징 같은 시였다. 그런 시를 가사로 삼아 가장 절절한 구절을 소리 높여 통곡하듯 부르도록 작곡되어 있었던 것이 수용자들의 큰 반향을 얻은 요인이 되었다.[3]


독재정권에 맹렬히 저항한 시인의 초기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

1982년 6월 5일 창작과비평사에서 ‘창비시선’ 33번째로 초판 1쇄가 발행된 <타는 목마름으로>는 김지하 시인의 시선집(詩選集)이다. 그냥 ‘시집’이 아니고 ‘시선집’이라고 한 까닭은 뒤표지에 실린 다음과 같은 편집자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은 우리 시대가 낳은 세계적인 시인 김지하의 서정시 모음이다. 1961년에 씌어진 '산정리 일기(山亭里 日記)'를 비롯한 12편의 초기시에서부터 시집 <황토(黃土)>에서 가려 뽑은 20편, 70년대 중반의 '빈산' '1974년 1월' '불귀(不歸)' '타는 목마름으로' 등 24편의 역작들을 망라한 이번 시집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빼어난 서정시인으로서의 지하의 참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안주할 수 없는 한 청춘의 몸부림과 갈등으로부터 시작하여, 민중의 아픔 속에 자신의 전부를 던져 싸워야 했던 지식인의 고뇌와 결의,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포용하여 사랑과 기쁨과 역동화(力動化)된 한(恨)의 시세계를 창조해낸 한 시인의 감동어린 탄생의 드라마가 여기에 펼쳐져 있다.

이 시집에 담긴 작품들은 처음으로 시인 자신의 손을 거쳐 정리된 정본(定本)을 제시한다는 점에서도 뜻깊은 일이며, 제4부에서는 '풍자(諷刺)냐 자살(自殺)이냐' '민족(民族)의 노래 민중(民衆)의 노래' 등 시인의 산문 5편을 실어 그의 시(詩)와 시학(詩學)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했다.
김지하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 뒤표지 / 필자 제공
그런데 위의 글에서 자못 어울리지 않는 표현을 보게 되는데, 그건 바로 <타는 목마름으로>를 가리켜 ‘김지하의 서정시 모음’이라고 한다거나 “이번 시집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빼어난 서정시인으로서의 지하의 참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 부분이다.

물론 이 시선집에 실린 시 가운데 서정적인 표현을 주로 담은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아가 사회 현실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서정적으로 표현한 것도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시들은 당대의 독재정권에 말문과 기본권을 잃은 민중들의 애환을 다룬 저항시로 분류해야 마땅한 것들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아마도 당시의 엄혹했던 검열을 의식하여 표지 글을 통해 서정시집인 것으로 위장(?)하여 판매금지 조치 등을 미연에 방지해 보고자 한 출판사의 처연한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이 시선집에 실린 시들의 표현 형식이 당시로서는 다분히 서정적인 풍자와 비판이라고 여긴 까닭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타는 목마름으로>는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 황토 이후’에서는 1970년 12월 출간된 김지하의 첫 시집 <황토> 이후에 창작된 '타는 목마름으로'를 비롯해 24편의 시를 싣고 있으며, ‘제2부 황토’에서는 '황톳길' 등 20편을, ‘제3부 황토 이전’에서는 '산정리 일기' 등 12편을, 그리고 ‘제4부 산문’에서는 '명륜동 일기' 등 산문 5편을 싣고 있다. 이처럼 이 시선집은 출간 당시까지 쓰인 김지하의 시 작품을 모두 담고 있는데, 특히 시인 자신의 감옥생활 등 남다른 고통의 기록을 바탕으로 탄생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다음과 같이 시집 말미에 있는 ‘후기(後記)’를 보면 이 같은 시인의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황토> 이후 십여년 만에 후기라는 걸 써본다. 이 책에 실린 것들은 모두 61년부터 75년 사이에 씌어졌거나 발표된 것들이다. 한번 훑어보니 도무지 거칠고 들쑹날쑹, 지난 세월 내 살아온 꼴을 한눈에 보는 것 같다. 제 살아온 꼴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필요가 있는 것이라면 이것들을 책으로 묶어 내놓는 것에도 한 가지쯤 의미가 있을 성싶다.

어떤 것들은 시상(詩想) 메모가 그대로 작품이라고 발표된 것들도 있다. 그런 것들은 손을 댔다. 대봤자 별로지만.
마당에 붓꽃이 새싹을 내밀었다. 새싹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그 배움이 앞으로의 작품이다.
어려운 때 어려운 일을 떠맡은 창비에 큰절 한 번 올린다.
김지하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 앞표지 / 필자 제공
한편, 시집의 전형적 판형인 가로 121mm 세로 210mm 크기로 만들어진 이 시선집의 앞표지를 보면 시인의 육필 원고 형상을 바탕 무늬 삼아 하단에 판화 기법으로 시인의 초상을 배치한 디자인 위에 제호 등을 나타낸 활자가 배치되어 있다.
김지하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 앞표지 날개와 속표지 / 필자 제공
표지 전체가 비닐 재킷으로 싸여 있으며, 앞표지 날개는 김지하 시인의 약력과 함께 이 시선집의 ‘후기’ 자필 원고 모습을 그대로 축소하여 싣고 있으며, 하단에 ‘목판화 오윤’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면지를 넘기면 나오는 속표지에는 앞표지 하단에 작게 자리 잡았던 시인의 초상을 표현한 판화가 좀 더 크게 중앙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위와 아래에 제호 등 활자를 배치하고 있다.

여기서 시인의 초상을 표현한 판화가 오윤(吳潤, 1946~1986)은 1980년대 신군부 정권 시절 민중 미술의 대표적인 작가였다. 소설가 오영수(吳永壽, 1909~1979)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1965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에 입학했다. 1969년 미술대학 선·후배들과 함께 ‘현실동인’을 결성하여 리얼리즘 미술운동을 제창하고, 김지하 등과 함께 ‘현실동인 제1 선언문’을 발표했다.[4]
김지하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 간기면 / 필자 제공
간기면을 보면 발행된 지 4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선명하게 붙어 있는 인지(印紙) 속의 ‘김지하’라는 이름 석 자가 눈길을 끈다. 아울러 당시 창작과비평사의 대표가 정해렴(丁海廉) 선생이었다는 것도 이채롭다.

그는 1939년 경기도 파주 출생으로 성균관대학교 문과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64년부터 교학도서·신구문화사·을유문화사 편집부에서 근무했고, 1976년부터 1996년까지 창작과비평사 편집부장·대표·고문을 역임했으며, 1997년부터 출판사 현대실학사를 차려 현재도 그 운영에 전념하고 있다. 출판계에 입문한 이후 1천여 종의 책을 편집·교정함으로써 출판사 대표라기보다는 편집자로서 평생을 살아온 분이다.


김지하 시인, 그는 과연 변절한 것일까 새로운 사상으로 나아간 것일까?

1991년 당시 명지대 재학생이었던 강경대 씨가 경찰에 맞아 숨지고 이에 항의하는 분신자살이 잇따르자 김지하 시인은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해 논란을 자초했다. “민중을 지도하겠다는 사람들이 목숨을 경박하게 버리는 반민중적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으며 자기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환상으로 민중을 선동하려 한다”고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이를 두고 진보 진영에서는 ‘변절자’라는 비판을 내놓기도 했다. 심지어 김지하 시인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을 때 그의 구명운동을 계기로 만들어진 자유실천문인협의회(현재의 ‘한국작가회의’)에서 제명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10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서 문예지 <실천문학> 여름호 대담에서 이 칼럼에 대해 해명하고 사과의 뜻을 표시했다.

하지만 그의 이전 행적을 보면 갑자기 행보를 바꾼 것은 아닌 걸로 보인다. 김지하는 1980년대 이후 이른바 ‘생명사상’에 몰두했다. 옥중 생활을 하는 동안 수많은 서적을 탐독하면서 ‘생명사상’을 깨쳤다고 한다. 언론 인터뷰 내용을 종합해 보면 “처음에는 생태학을 파고들었는데 그것만 가지고서는 세계와 삶의 진화를 이해하기에 인간은 너무나도 복잡하고 심오했다”면서 “선(禪)과 불교에 관한 깊은 내면적 지식과 무의식적 지혜를 갈구하게 됐다”는 것이다.

1990년대에는 절제의 분위기가 배어나는 내면의 시 세계를 보여줬다. <중심의 괴로움>(1994), <비단길>(2006), <새벽강>(2006), <못난 시들>(2009), <시김새>(2012) 등 시집을 꾸준히 펴냈다. 2018년 시집 <흰 그늘>과 산문집 <우주생명학>을 끝으로 절필을 선언했다.
소설가 박경리
한편, 김지하는 1973년 소설가 박경리(朴景利, 1926~2008) 선생의 딸 김영주와 결혼했으며, 부인은 2019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김지하 시인이 박경리 선생의 사위가 된 사연도 흥미롭다. 1970년 '오적'을 <사상계>에 발표한 김지하는 사법당국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1972년 ‘10월 유신’ 선포 후 피신을 위해 서울 정릉 인근의 박경리 선생 집을 찾아가 숨겨 달라고 청했지만 박경리 선생은 그의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단다. 외동딸 김영주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김지하는 원주로 피신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지하 시인이 숨어 있던 원주 집에 박경리 선생과 김영주가 찾아와 그때 일을 사과했다고 한다.

이렇게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음이 통한 김지하와 김영주는 1973년 4월 서울 명동대성당 반지하 묘역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김 추기경은 부부간의 예절과 함께 김 시인의 앞길을 예감한 듯 비상한 결심과 각오를 강조했단다.

결혼 이듬해 김지하 시인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감되자 박경리 선생은 직접 면회를 오가며 옥바라지에 나섰다. 6·25전쟁 때 부역자로 몰린 남편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자 추위가 매서운 겨울날 옷 보따리를 들고 흑석동 집에서 서대문까지 걸어 면회를 다녔다는 박경리 선생이 사위의 옥바라지까지 하게 된 것이다. 당시 사형을 선고받은 사위를 살리기 위해 정권을 자극하지 않는 방법을 찾아 조용히 백방으로 뛰었고, 그 덕분인지 김지하는 감형을 받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장모뿐만 아니라 아내 김영주 또한 김지하가 감옥살이 후유증으로 20년간 수도 없이 병원 입·퇴원을 반복하는 동안 두 아들 양육부터 집안 살림, 간호까지 모든 것을 책임졌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맞서 홀로 딸을 키운 어머니의 삶을 딸로서, 그리고 한 남자의 아내로서 고스란히 이어받았던 것이다.

지난 2022년 5월 8일 눈을 감은 김지하 시인은 이제 원주 흥업면 선영에서 먼저 그의 곁을 떠났던 부인과 함께 영면에 들었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숱한 소용돌이와 굴곡으로 점철된 삶을 벗어난 만큼 오해와 미움 속에 곁을 떠났던 그들을 만나 하늘에서나마 화해하고 두 손 맞잡기를 바란다. 또다시 5월을 맞이하면서, 더 이상 ‘타는 목마름으로’ 무언가를 갈망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김기태 '처음책방' 설립자


[1] 브루노 크라이스키(Bruno Kreisky, 1911~1990)는 오스트리아의 정치가로 1959년부터 1966년까지 외무장관을, 1970년부터 1983년까지 총리를 역임했다. 1977년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을 제정하여 남아공 넬슨 만델라에게 첫 상을 수여했다.
[2] 민세안재홍기념사업회가 민족운동가 안재홍(安在鴻·1891~1965) 선생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0년 제정했다. 사회통합과 학술연구(한국학) 2개 부문으로 나눠 공로가 큰 인사를 1명씩 선발하고 상금 2천만 원을 수여한다.
[3]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타는 목마름으로), 집필 이영미(2013).
[4] ‘현실동인’은 오윤, 임세택, 오경환, 강명희 네 사람의 청년작가와 이론가로는 서울대 미학과 출신의 시인 김지하와 미술평론가 김윤수가 참여한 그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