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마주친 물방울을 50년간 그린 사나이

故 김창열 개인전

'물방물 화가' 작고 3주기 회고
반세기에 걸쳐 그린 38점 공개

뉴욕·파리에서 생활고 시달리다
햇살에 빛난 물방울 보고 전율
"나는 모든 것을 물방울에 녹여"
김창열, 물방울, 2012, 캔버스에 유채, 162 x 112 cm Courtesy of Kim Tschang-Yeul Estate and Gallery Hyundai / 갤러리현대 제공
50년.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 화가 중 한 명인 김창열 화백(1929~2021·사진)이 ‘물방울 그림’을 그리는 데 쏟은 시간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어떻게 50년씩이나 질리지도 않고 한 가지 주제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냐고. 그에게 물방울은 어떤 의미냐고.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는 김 화백의 작고 3주기 회고전 ‘영롱함을 넘어서’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가늠해볼 수 있는 전시다. 김 화백의 1970년대 초반 작품부터 2019년 작품까지를 망라하는 그림 38점이 나왔다.

“물방울은 그냥 물방울”

김 화백이 물방울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는 한 편의 드라마를 방불케 한다. 젊은 시절부터 여러 미술 운동의 선두에 서며 두각을 드러낸 김 화백은 세계 미술계에 도전하기 위해 1965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동양에서 온 무명 화가를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훗날 김 화백은 무관심과 생활고에 시달리던 이때를 “악몽 같았다”고 회고했다. 1969년 프랑스 파리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새 캔버스를 살 돈도 없었다. 그래서 김 화백은 그림을 그린 캔버스를 재활용해 또 다른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물감이 떨어지기 쉽도록 캔버스 뒷면에 물을 뿌려뒀다. 그러던 1971년 어느 날 아침, 김 화백은 햇살을 받으며 캔버스 표면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물방울의 아름다움에 새삼 눈을 떴다. “그때 물방울을 만나고 존재의 충일감에 몸을 떨었다”고 생전의 김 화백은 회고했다.
김창열, 물방울 ENS79002, 1979, 캔버스에 유채, 182 x 227 cm Courtesy of Kim Tschang-Yeul Estate and Gallery Hyundai / 갤러리현대 제공
'물방울' 세부.
이후 그는 캔버스에 물방울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물방울 연작은 1972년 첫 전시 직후부터 프랑스와 한국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1층 전시장에 나와 있는 1970년대 작품들에 그의 초기 화풍이 드러나 있다.

인기를 얻은 그에게 “왜 물방울을 그리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평론가들은 비극을 보고 흘린 눈물, 세상을 정화하는 물, 환상과 현실의 경계 등 다양한 해석을 내놨다. 하지만 정작 그의 답변은 이랬다. “특별한 의미 없어. 물방울이 그냥 물방울이지.”

같은 물방울이 없다

김 화백은 자신의 그림을 굳이 현학적인 말로 포장하려 하지 않았다. 오직 ‘더 아름다운 물방울 그림’을 그리는 데만 열중했다. 김시몽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 명예관장은 “마치 아이가 구슬 놀이를 하듯이 김 화백은 순수한 마음으로 물방울의 시각적 효과를 연구하고 즐겼다”고 말했다.
생전의 김창열 작가. 갤러리현대 제공
수없이 많은 물방울을 그렸지만 그중 똑같은 물방울은 하나도 없었다. 2층과 지하 전시장에 걸린 1980년대 이후 작품들에서는 글자 위에 맺힌 물방울, 스며들며 글자를 번지게 한 물방울, 큰 물방울, 빨리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 그러다 합쳐진 물방울, 제멋대로 찌그러진 물방울 등 다양한 변주를 통해 김 화백의 끊임없는 실험을 엿볼 수 있다.

김 화백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모든 것을 물방울 속에 녹이기 위해 물방울을 그린다.” 그 말대로 평생 수행하듯 무아지경으로 그린 캔버스 속 물방울에는 김 화백의 50년에 걸친 예술혼이 녹아들어 있다. 심오한 설명도, 화려한 색채나 모양도 없는 그냥 물방울 그림이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건 김 화백의 이런 순수한 열정과 집념이 느껴지기 때문이라는 평가다.
김창열 《영롱함을 넘어서》 전시 전경 / 갤러리현대 제공
김 화백의 작품을 시대별로 고루 감상하며 그의 작품세계 전반을 돌아볼 수 있는 전시다. 방탄소년단(BTS) RM이 소장한 작품도 한 점 나와 있다. 전시는 6월 9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