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제국' 뒤흔든 내분…그 뒤엔 '한지붕 11가족'

민희진 사태로 변곡점 맞은 'K멀티레이블' 체제

하이브 고성장 이끈 '멀티레이블'
모기업은 '경영' 레이블은 '창작'
운영 효율 높지만 과열경쟁 유발
SM·JYP·YG 제치고 업계 1위로

역사 짧은 K팝, 레이블 색깔 '비슷'
소니뮤직 등 해외 레이블과 달리
K팝 타깃층 겹쳐 '콘셉트 충돌'
매출 줄세우기에 베끼기 논란도
2022년 하이브 레이블 어도어에서 데뷔한 ‘뉴진스’(위)와 2024년 또 다른 레이블 빌리프랩에서 데뷔한 ‘아일릿’(아래). /어도어·빌리프랩 제공
BTS(방탄소년단)를 배출한 국내 1위 엔터테인먼트 기업 하이브와 어도어(하이브 자회사) 민희진 대표의 폭로전이 지난 한 주를 뜨겁게 달궜다. 이후 공방의 초점은 하이브와 민 대표가 맺은 주주 간 계약으로 모아졌다. 민 대표 측은 하이브와 ‘노예계약’을 맺어 회사에 묶였다는 입장이고, 하이브 측은 민 대표가 자신의 지분을 늘려 경영권 독립의 포석을 마련하고 있다고 의심한다.

엔터업계에서는 양측 주장의 진위와 별개로 “곪아 있던 문제가 터졌다”는 반응이 나온다. 민 대표가 간담회에서 “하이브 경영진이 뉴진스를 ‘서자(庶子)’ 취급하고, 방시혁 의장이 프로듀싱하는 레이블의 아티스트를 밀어주는 ‘군대 축구’식 경영을 했다”는 취지의 불만을 제기한 배경에 하이브가 도입한 ‘멀티레이블’ 체제에 내재된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후발주자 하이브가 YG·SM 제친 비결

레이블은 음반을 만들고 유통하는 회사를 의미하지만 국내에서는 아티스트의 소속사 개념으로 혼용된다. 아티스트 매니지먼트 사업과 음악 제작이 함께 가는 K팝 특유의 구조 때문이다. 멀티레이블은 이런 레이블을 모기업 아래에 자회사 형태로 여러 개 두는 체제다. ‘지방자치제’에 비유할 수 있다.

2020년 유가증권시장에 상장한 하이브는 공격적인 인수합병(M&A) 및 신설을 통해 산하에 11개 레이블을 자회사로 뒀다. 국내 엔터업계 후발주자인 하이브가 SM, JYP, YG엔터를 제치고 업계 1위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던 데는 멀티레이블 체제가 적잖은 기여를 했다는 분석이 나온다.레이블이 자회사로 분리돼 있으면 성과 지표를 명확히 할 수 있어 경쟁을 유도하기 좋고, 외부 투자 유치와 협업에도 용이하다. 자회사 레이블로서는 홍보·마케팅, 팬덤 관리 등을 모기업 체계 안에서 지원받을 수 있어 좋다. 이처럼 멀티레이블은 규모가 커진 회사의 경영 효율성을 높이고 수익 구조를 안정화하는 데 기여한다. 실제로 하이브는 세븐틴이 소속된 플레디스엔터를 인수하면서 BTS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를 낮출 수 있었다.

SM·JYP도 하이브 벤치마킹

K팝 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멀티레이블 체제는 확대하는 추세다. SM, YG, JYP엔터는 각 회사 수장이 모든 제작 과정에 참여하는 방식이었지만 최근에는 멀티레이블 방식을 점차 도입하고 있다. 양현석 대표 중심으로 가는 YG를 제외하면 SM과 JYP는 하이브 같은 자회사 형태는 아니지만 사실상의 멀티레이블 체제를 도입했다.

JYP엔터는 일찍부터 박진영 1인 체제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여러 제작 본부를 운영하며 아티스트의 다양한 색을 찾아주기 위해 노력했다. 최근에는 JYP 내에 독립적인 본부인 ‘스튜디오 제이(STUDIO J)’를 설립해 밴드 특화 아티스트를 육성하고 있다. SM엔터도 지난해 ‘SM 3.0’을 발표하며 이수만 전 총괄 중심으로 진행하던 앨범 제작 방식에서 탈피해 멀티레이블 체제를 도입했다.

한국형 멀티레이블의 ‘아킬레스건’

문제는 역사가 짧고 외연이 한정적인 K팝 특성상 멀티레이블의 장점을 누리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음악 전문가들은 “(멀티레이블이) 레이블마다 장르나 색이 다르면 장점으로 작용하지만 아이돌 중심의 K팝 시장에서는 충돌이 일어나기 쉽다”고 지적한다. 하이브는 최근 3년 내 세 개 이상의 걸그룹을 론칭했다. 뉴진스(어도어), 르세라핌(쏘스뮤직), 아일릿(빌리프랩) 모두 하이브 지붕 아래 각기 다른 가족(레이블)이 선보인 아티스트들인 만큼 내부 경쟁이 치열해지기 쉽다. 민 대표는 간담회에서 “다른 레이블 소속 아티스트인 아일릿이 뉴진스와 유사하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두 그룹의 콘셉트와 안무 등이 겹친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최영균 대중문화평론가는 “아이돌 프로듀싱은 미적이고 정서적인 요소의 집합체”라며 “계량화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만큼 앞으로도 충분히 유사성 문제가 반복적으로 제기될 수 있다”고 말했다.

“레이블 독립성과 고유성 살려야”

음악산업의 역사가 긴 서구는 멀티레이블 체제가 체계적으로 자리 잡혀 있다. 실력 있는 아티스트와 뜻이 맞는 레이블 회사가 만나 음반을 내고, 성공을 거두면 다른 아티스트를 영입하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워너뮤직(WMG), 유니버설뮤직(UMG), 소니뮤직(SME)과 같은 대형 모회사가 이들을 흡수했다. 이상민 음악 큐레이터는 “각 레이블만의 경영과 마케팅 방식 등 수십 년에 걸쳐 쌓아온 레거시가 있어 각자의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설명했다.

이를테면 유니버설뮤직 산하의 아일랜드 레코드는 레게 음악의 전설 밥 말리를 배출했고 에이미 와인하우스, 뮤즈 등 기라성 같은 아티스트의 음반을 발매했다. 마이크 올드필드, 섹스 피스톨즈 등의 전설적인 음반을 낸 버진 레코드도 록을 비롯한 대중음악 분야의 대표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반면 K팝은 역사가 30년 정도밖에 되지 않고 비주류 장르에서 시작했다. 또 아티스트 육성과 매니지먼트를 토대로 운영된다는 점에서 글로벌 음악 기업과는 구조가 다르다. 김도헌 대중음악평론가는 “수장 중심에서 개별 프로듀서 중심의 멀티 체제로 가는 과도기”라며 “(하이브와 민 대표 간 분쟁은) 산하 레이블에 각각의 자유와 성과를 어떻게 보장해줄지 충분한 내부 조율과 논의 과정이 부족했기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지적했다.

개별 레이블의 고유한 색을 키우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임희윤 대중음악평론가는 “멀티레이블이 잘 작동하려면 각 레이블만의 음악과 아티스트를 보여줘야 한다”며 “실력 있는 대표 프로듀서를 키우고 그들의 색을 존중해야 K팝에서도 다양한 IP(지식재산권)와 음악이 나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다은 기자 ma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