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한 점에 수십억…세계 최정상 여성 화가가 청담동에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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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정상급 작가 세실리 브라운살아있는 여성 예술가 중 세계에서 가장 작품 값이 비싼 작가(경매 최고 낙찰가 약 94억5000만원).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본관에 작품을 전시한 최초의 여성 생존 예술가(지난해). 영국 출신의 작가 세실리 브라운(55)이 미술계와 미술 시장 모두에서 정점에 올랐다는 증거들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만큼은 브라운의 이런 명성을 체감하기 어려웠다. 브라운의 작품은 직접 보고 세부를 찬찬히 뜯어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는데, 마지막으로 국내에 그의 작품이 전시됐던 게 2011년이기 때문이다.
서울 청담동 글래드스톤서 개인전
모든 예술작품은 실제로 봐야 제대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브라운의 작품은 더욱 그렇다. 지난해 미국 뉴욕타임스(NYT) 공동 수석 예술 평론가 로메르타 스미스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전시에 대해 호평하며 “브라운의 작품이 산만해서 별로라고 했던 내 예전 평론은 틀렸다. 그림을 찬찬히 뜯어보지 않아서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게 이를 방증한다. 스미스는 이렇게 덧붙였다. “브라운의 작품은 복잡하게 예술적이고 아름다워서 직접 오랜 시간을 들여 봐야 한다. 전시회를 다시 방문할 때마다 그림들은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복잡하지만 매력적인 화풍
서울 청담동 글래드스톤에서 열리고 있는 브라운의 개인전 ‘나나와 다른 이야기들’은 그의 작품을 국내에서 직접 만나볼 수 있는 드문 기회다. 점당 가격이 적게는 수억원, 많게는 수십억원에 달하는 작품이 총 일곱 점 나왔다.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된 신작들이다.브라운의 작품 주제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그는 에두아르 마네나 에드가 드가 등 미술사 거장들에게서 영감을 받아 성(性)과 즐거움, 자기 주변의 사물과 꿈 등 다양한 소재를 그린다. 이번 전시작들은 기존 브라운의 작품들보다 성적인 뉘앙스가 덜하고 좀 더 유머러스한 게 특징이다.예컨대 이번 전시의 대표작인 ‘나나’(2022~2023)는 마네의 똑같은 이름 작품(1877)에서 모티브를 얻은 그림으로, 익살맞은 얼굴 표현이 재미있다. ‘스위티의 귀환’(2023~2023)에는 2001년 그린 화제작 ‘스위티’ 속 인물이 중년이 돼 즐거운 휴식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담겨 있다.그의 작품을 처음 보는 관객들은 당황할 수도 있다. 작품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다. 캔버스에는 수없이 많은 요소들이 촘촘하게 배열돼 있다. 지하 1층에 있는 작품들은 추상성이 더 강해 더욱 자세히 들여다봐야 한다. 대충 보면 아무 의미도 없는 붓질로 보일 가능성이 높다. 전시장에서 만난 브라운이 “내 그림을 천천히 꼼꼼하게 봐달라”고 한국 관객에 당부한 건 이런 이유에서다.“이해하기 쉽고 강렬하지만 금방 잊히는 그림이 아니라, 보면 볼수록 새로운 심상이 떠오르는 그림을 지향합니다. 영화나 글 등 다른 매체와 구분되는 그림만의 매력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작품 속 무의미해 보이는 붓질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 모양과 뜻이 숨겨져 있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그림만의 매력을 찾는다”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다. 세상에는 말이나 글, 영상이나 사진으로 명료하게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예컨대 모호한 감정, 어젯밤에 꾼 꿈, 요정 설화 같은 것들이 그렇다. 하지만 그것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브라운은 “확실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해 그 의미를 어렴풋하게나마 다른 이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게 그림만의 장점”이라고 설명했다.예컨대 ‘굿 퀸 맙’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에 등장하는 요정 ‘맙 여왕’과 영국 빅토리아 시대 그려진 요정을 주제로 한 그림들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브라운은 “요정처럼 낭만적이고 기이한 미지의 존재들에 끌린다”고 했다. ‘마법사의 제자’도 환상적인 모티브를 차용했다. 미키마우스 만화영화 속 집안의 물건들이 새벽에 살아 움직이는 장면에서 영감을 얻었다.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방 기물과 레몬 등 식재료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브라운은 작가 생활 초기인 1990년대 중반부터 이런 철학과 화풍을 고수해왔다. 영국에서 미술학교를 졸업한 그는 1994년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다. 브라운은 “당시 영국에서는 개념미술과 설치미술이 대세였기 때문에, 제대로 ‘그림’을 그리려면 뉴욕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이후 2000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갤러리인 가고시안에서 전시를 연 후 본격적으로 성공 가도를 달렸다. 그리고 지난해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전시를 열며 생존 작가로서 극히 일부만 누릴 수 있는 영광의 주인공이 됐다.브라운은 이런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2층에서는 이때까지 써온 붓 대신 롤러를 사용한 신작들이 눈에 띈다. ‘라벤더의 블루’(2023)가 대표적이다. 브라운은 “새로운 방향을 찾기 위해 늘 내 자신과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세계 미술계의 정상급 작가의 수작들이 나온 만큼, 비좁은 갤러리 전시 공간에도 불구하고 현대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관람에 후회 없을 전시다. 6월 8일까지 열린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