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후와 아이돌이 함께 전시를 연다면 ... 조각가 문신과 권오상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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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라리오갤러리 문신 권오상 2인전'덕후'는 위대하다. 좋아하는 대상을 알아가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기 때문이다. 화질이 좋지 않아 희미하게 보이는 몇 십년 전의 영상을 돌려본다거나, 오로지 몇 페이지만을 위해 수백 장이 넘는 책을 읽기도 한다. 뛰어난 재능과 창의성을 가진 작가들도 맘 속 깊은 곳의 열정을 불타오르게 하는 '덕질'엔 예외란 없다.
'문신 권오상, 깎아 들어가고, 붙여나가는'
미술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진 조각'이라는 장르를 처음 들고 나타난 작가 권오상도 지난해 '흔한 덕후'중 한 명이 됐다. 그는 브론즈나 메탈, 암석 등 전통 조각에서 주로 쓰인 무거운 재료를 쓰지 않았다. 그 대신 스티로폼 위에 다양한 사진을 조각내 콜라주 기법으로 이어 붙였다. 현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새로운 조각의 등장에 예술계는 열광했다. 해를 거듭하며 '함께 일해보자'는 러브콜이 쏟아졌다.

이런 권오상이 첫눈에 반해 푹 빠진 '그만의 아이돌'은 바로 조각가 문신. 문신은 본래 회화 작가였지만, 프랑스 유학을 떠나며 조각가로 전향했다. 1971년 발카레스에서는 높이만 13m에 달하는 목조각 '태양의 아들'을 전시하며 프랑스 예술계에 반향을 일으켰다. 지금의 부인과 결혼할 당시 프랑스에서 '부부에게 모두 영주권을 줄 테니 한국으로 돌아가지 말아달라'고 했을 정도다.
문신은 기존의 다른 조각가들처럼 형태를 만들어 붙이는 것이 아닌 덩어리를 얹은 후 깎고 문대는 과정을 통해 작품을 만들어냈다. 흙과 나무로 시작해 브론즈, 돌, 대리석 등 재료에도 제한되지 않고 작업을 펼쳐왔다. 1990년대에는 한국 작가 중 처음으로 스테인리스를 사용한 조각에 뛰어든 선구자이기도 하다. 올림픽공원 한가운데 세워진 스테인리스 조각 '올림픽 1988'도 그의 작품이다.

그는 그 이후로 문신의 덕후가 됐다. 매일 문신에 대해 찾아보고 주변 컬렉터들에게 알렸다. 문신의 자료가 남아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숙명여대 미술관에 그가 남긴 책이 있다는 것을 듣고는 찾아가 책 제목을 찍어 헌책방을 뒤져 구했다.
아라리오갤러리서 개인전을 열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에도 권오상은 '문신'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갤러리 측에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있는데, 함께 2인전을 해 보면 어떻겠냐'라고 역으로 제안을 해왔다. 아라리오갤러리도 마침 문신의 조각 작품 30점을 갖고 있었을 정도로 문신에 대해 애정이 깊었다. 그렇게 이번 2인전 '문신 권오상, 깎아 들어가고, 붙여나가는'이 성사됐다.
문신 조각의 가장 큰 특징은 '시멘트리', 즉 대칭적 요소다. 양쪽이 비슷하지만 완전히 데칼코마니는 아닌 것이 특징이다. 문신은 자연과 우주 등 보이지만 인간이 손댈 수 없는 미지의 것을 조각으로 탐구했다. 똑같지 않은 '비슷한' 대칭 조각도 나뭇잎 등을 보며 자연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번 전시에서도 대칭적 특징을 볼 수 있는 작업물들이 나왔다.
사진을 무작위로 찍어낸 것 같이 섬세하지만 모두 손으로 그려넣은 작업이다. 191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이미 세상에 나왔던 추상적 조각들을 원형으로 삼고 3D스캐너로 본따 그 위에 사진을 그려붙여 '권오상표 새 조각'을 창조한다.
한 층 위로 올라가면 층고가 높은 공간에 문신의 스테인리스 작업이 놓였다. 문신이 스테인리스 작업을 하며 가장 강조한 것은 바로 '주변을 비추는 조각'이라는 메시지다. 스테인리스에서 반사되는 빛으로 주변을 비추겠다는 그의 의지가 작품에 담긴 것이다.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들은 매끄럽지 않게 마무리했다. 가장자리가 모두 오돌토돌해 마치 톱니바퀴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가장 윗층인 3층에는 '인간이 살 수 있는 조각'이라는 주제로 작품들이 나왔다. 가구와 조각의 사이를 넘나드는 실용적 작품들이다. 실제 문신이 직접 사용했던 조각 테이블, 권오상이 구상한 소파 작품 두 점이 놓였다. 관객은 직업 권오상이 만든 소파에 앉아 문신의 테이블을 감상할 수 있다.
팬과 그의 아이돌이 만들어 낸 환상의 컬래버레이션. 조각으로 관객에게 말을 거는 두 작가의 2인전은 서울 아라리오갤러리에서 6월 22일까지 만날 수 있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