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따로 활동…여든 즈음에 만난 작가 남매

학고재 '뉴 라이프'

47년생 동생 윤석구 조각 뒤에
39년생 누나 윤석남 그림 걸어
50여년만에 작가로서 첫 조우

윤석구, 천을 감싸 인간애 표현
윤석남, 드로잉으로 위안 전해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에서 윤석남과 윤석구의 2인전 ‘뉴 라이프’가 열리고 있다. 전면에 놓인 설치작은 윤석구의 ‘뉴 라이프-바나나’. 뒤편엔 윤석남의 드로잉이 벽을 가득 메웠다. /학고재 제공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에서 오누이 기획전 ‘뉴 라이프’가 열리고 있다. 남매는 3남4녀 가운데 1939년생 둘째 윤석남과 1947년생 여섯째 윤석구다. 여든을 훌쩍 넘긴 누나 윤석남(왼쪽)과 여든을 바라보는 동생 윤석구(오른쪽)는 저마다 반세기 넘게 작품활동을 해왔다. 하지만 함께 전시회를 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시는 윤석구의 설치 작품과 윤석남의 회화를 함께 보여주면 어떻겠느냐는 학고재의 제안으로 이뤄졌다.

학고재의 문을 열자마자 눈에 띈 것은 팔을 한껏 벌리고 서 있는 남성이다. 영화 ‘박하사탕’의 설경구를 연상하게 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 비례 드로잉을 본떠 만들었다. 조각은 알록달록한 천으로 둘러싸여 있다. 윤석구는 인체 비례라는 진지한 작품에 화려한 천을 씌우면서 다빈치에서부터 비롯한 과학만능주의에 비판적 시선을 보낸다. 과학이면 뭐든 가능하다는 세태를 비꼬았다.전시에는 빌렌드로프의 비너스 조각도 있다. 비너스상도 화려한 색깔과 문양의 천들을 덮어쓰고 있다. 피곤하고 지친 기색조차 드러내지 못하는 현대인의 아픔이 담겨 있다.
윤석구는 사물을 천으로 감싸는 작품을 선보여왔다. 그는 어느 산골에서 벌목 현장을 목격했는데 반듯한 나무만 트럭에 실려 가고 뒤틀린 나무들은 모두 버려졌다. 윤석구는 버려진 나무들을 주워다가 천을 감싸줬다. 그는 나무에 새로운 생명을 주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다음에는 아파트에서 버려진 물건을 가져다가 천으로 싸맸다. 의자도 천으로 덮어줬고, 탁자도 마찬가지 대접을 했다. 전시 제목을 ‘새로운 생명’이라는 뜻의 ‘뉴 라이프’로 지은 배경이다.

전시장 가장 안쪽의 벽은 누나 윤석남의 드로잉 작품이 가득 걸려 있다. 윤석남은 여성 독립운동가 100인을 죽기 전까지 모두 그리는 작업을 진행하며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다.그의 드로잉에는 시인지, 편지인지 혹은 그저 낙서인지 모를 글들이 쓰여 있다. 문학을 사랑하는 윤석남은 자신의 작품에 글을 적어 넣으며 서사를 부여했다. 윤석남의 아버지는 소설가였다.

나무를 이용해 조각과 설치 작품을 제작했던 윤석남은 2000년대 들어설 무렵부터 ‘아이디어가 고갈됐다’는 걸 느꼈다고 했다. 그는 조각과 설치미술을 관두고 낙서를 하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드로잉을 시작했다.

윤석남은 드로잉으로 마음속의 응어리를 풀어냈다. 2년이란 시간을 드로잉에만 쏟아부으며 치유받았다. 그가 선보이는 그림 중에는 그네에 인물이 매달려 있는 듯한 작품이 많다. 윤석남은 ‘지상에서 딱 20㎝만 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20㎝가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높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림 안에 나타나는 모든 여성은 자화상이다.두 작가는 쉬운 작품 속에 묵직한 메시지를 담았다. 남매의 전시는 25일까지 이어진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