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자율'에 맡긴 밸류업…매력적인 '당근책' 없어 실효성 의문

'기업가치 제고계획' 가이드라인 발표

지배구조 개선·자사주 소각안 등
기업가치 제고 연 1회 공시해야
정부가 2일 상장사 밸류업 공시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김소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왼쪽)과 정은보 한국거래소 이사장이 ‘기업 밸류업 2차 세미나’ 행사장에 들어서고 있다. /이솔 기자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괜히 공시했다가 ‘경영 족쇄’로 작용할까 우려됩니다.”(A대기업 재무팀 임원)

“중견·중소기업은 밸류업 계획을 설계·관리할 인력을 확보하기도 쉽지 않습니다.”(중견 지주사 재무팀 차장)상장사 재무·기업설명(IR)팀 관계자들의 고민이 깊어졌다. 2일 금융당국이 공개한 ‘기업가치 제고 계획 가이드라인’에 대해 공시 부담만 키울 것이란 볼멘소리도 나온다. 이번 가이드라인의 골자는 지배구조 개편안 등이다. 하지만 매력적 ‘당근책’이 없는 만큼 실효성이 크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후진적 지배구조 개선안 담아라”

금융당국이 이날 공개한 가이드라인은 지배구조 개선안까지 담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기업가치를 훼손하는 중복상장(물적분할한 뒤 분할한 회사 재상장)과 오너 일가의 비상장 개인회사 보유와 같은 지배구조 문제를 어떻게 손질할지 등을 포함하도록 권유했다. 지배구조 개선안의 하나로 감사 독립성 강화를 위해 감사위원 분리 선출 현황과 향후 계획을 밝히는 방안도 담도록 제안했다. 한국거래소가 마련한 기업지배구조 15대 핵심 지표를 얼마나 준수하는지, 앞으로 준수율을 얼마나 높일지 등의 계획도 담도록 권고했다. 이 같은 지배구조 개선안은 상장사들이 판단해서 취사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지배구조 개선안을 비롯한 비재무 지표 외에 주가순자산비율(PBR)·주가수익비율(PER)·자기자본이익률(ROE)·배당성향·배당수익률 같은 재무 관련 지표의 현황과 개선안도 담아야 한다. 예컨대 중장기 ROE 15% 이상이라는 목표치를 설정하고 이를 충족하기 위한 사업 부문별 투자, 연구개발(R&D) 확대, 사업 포트폴리오 개편, 자사주 소각과 배당 등 주주환원, 비효율적 자산 처분 등의 계획도 수립해야 한다.

금융당국은 상장사들에 연간 1회 이 같은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자율적으로 공시하도록 권고했다. 연 1회 공시 사이에 어떤 노력을 이행했는지 잘된 점과 보완이 필요한 사항을 기재해야 한다.

○“중견·중소기업 참여율 낮을 것”

상장사들은 금융당국 가이드라인의 실효성이 크지 않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정부·주주 눈치를 보는 대기업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줄줄이 도입할 전망이다. 하지만 제고 계획 달성 압박이 커질 수 있는 만큼 계획을 보수적으로 잡을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한 대기업 재무팀 관계자는 “올 들어서 중동 분쟁이 불거지는 등 대내외 변수가 많아 당장 1년 후 사업 계획과 예산을 편성하기도 쉽지 않다”며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달성하지 못할 경우 불어닥칠 후폭풍도 상당할 것”이라고 했다.

형편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중견·중소기업은 불만이 더 크다. 관련 인력부터 부족하다. 중견·중소기업들은 관련 공시·IR 담당자가 2~3명에 불과한 곳이 상당하다. 중견 지주사는 인력난이 더 심각하다. 지난해 말 SNT홀딩스(10명), F&F홀딩스(8명), 농심홀딩스(7명) 등의 관련 직원은 10명 미만이었다. 관련 공시를 대신해줄 컨설팅·회계법인 일감만 늘려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한 중견기업 재무팀 관계자는 “기업가치 제고 계획 공시를 한다고 결정하면 인력 충원에 나서야 할 것”이라면서도 “인력 투자에 나설 만큼 인센티브가 크지 않아 제고 계획에 나설지는 미지수”라고 했다. 그만큼 중견·중소기업의 참여율이 크게 떨어질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일본만 봐도 대기업 참여율은 40%대에 불과했다. 일본거래소에 따르면 작년 말 한국의 유가증권시장 격인 프라임시장 상장사 중 39.9%만 기업가치 제고안을 공시했다. 중견기업이 많은 일본 스탠더드 시장 상장사 가운데선 11.8%만 참여했다.금융당국은 기업의 자발적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주기적 지정감사 면제 심사 때 가점을 부여하거나 거래소 연부과금 등을 면제해준다는 인센티브를 제시했다. 하지만 기업들은 세제 혜택 등 더 강력한 지원책이 나와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기획재정부는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배당소득 분리과세를 추진하겠다는 계획이다. 분리과세 때 현행 원천세율(15.4%)보다 높은 20~30%의 단일 세율을 적용하는 방안 등을 검토하고 있다. 기재부는 구체적인 적용 대상 및 세율은 오는 7월 세법 개정안 때 공개하기로 했다. 하지만 야당이 입법사항인 이 같은 세제 혜택에 반대하고 있는 만큼 인센티브가 현실화될지는 미지수다.

김익환/이시은/선한결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