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클래식의 날카로운 첫 키스, '바이올린을 든 마녀' 정경화

[arte]류태형의 K-클래식 인물열전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K-클래식’은 이제 생소하지 않은 표현이다. 우리가 아닌 유럽 사람들이 쓰기 시작한 말이다. 2010년대 이후 세계 클래식 콩쿠르에서 강세를 보인 한국 음악가들을 보며, 그들은 K-팝에 대비해 K-클래식이라 부르며 원인을 분석했다. 2020년 개봉한 티에리 로로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K-클래식 제너레이션’의 제목이 되기도 했다. 황수미, 임지영, 김태한이 잇따라 우승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가 열리는 벨기에 출신의 로로 감독은 K-클래식 현상의 원인으로 한국의 음악 교육 시스템과 젊은 청중에 주목한다. 앞으로 ‘K-클래식 인물열전’에서는 이런 K-클래식을 만들어온 주인공들인 연주가들을 한 명씩 소개한다. 그 첫 순서는 물론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다.
예술의전당 제공
정경화의 첫 녹음, 차이코프스키/시벨리우스 협주곡을 처음 들었을 때가 떠오른다. 영국 레이블 데카 음반을 라이선스 발매한 엘피로 들었던 그 날은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 같이 남아있다. 시퍼런 날을 허공에 번뜩이며 활은 신들린 듯 질주했다. 바이올린은 현을 뿌리치며 슬픈 듯 울부짖었다. 영감이 가득했던 그 연주에 놀란 서양인들은 그녀를 '바이올린을 든 마녀'라고 불렸다. 정경화는 K-클래식이란 말이 존재하지 않았던, 아니 한국이 어디 붙어있는 나라인지도 잘 모르던 1970년대, 한국인이 갈 수 있는 거리를 넘어, 가장 멀리까지 갔던 연주자였다. 정경화는 1948년 서울에서 4남 3녀 중 셋째딸로 태어났다. 딸의 재능은 어머니 이원숙 여사(2011년 작고)가 발견했다. 두 살 때부터 노래를 곧잘 하던 셋째 딸 경화를 유심히 관찰했다. 딸의 음정은 완벽했다. 어머니는 경화에게 노래를 시켰고 피아노를 가르쳤다. 1950년대 초 6.25 전쟁통에 부산까지 피란 내려갈 때도 서울서 피아노를 싣고 왔다. 그럼에도 경화는 피아노에 흥미를 붙이지 못했다.

한국은 너무 좁았던 바이올린 신동

신이 내린 악기는 따로 있었다. 바이올린의 음색을 듣고 그 자리에서 매혹됐다. 결국 일곱 살 때 바이올린을 시작한 그녀는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할 놀라운 집중력을 보였다. 딱 두 번 레슨을 하고 초등학교 입학식 때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모조리 바이올린으로 연주했다. 3개월 만에 나간 콩쿠르에서 3년 넘게 배운 어느 상급생을 제치고 1등을 했다.

신동 정경화는 아홉 살 때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을 서울시향과 협연했다. 한국의 콩쿠르는 모두 휩쓸다시피한 그녀에게 한국땅은 너무나 좁았다.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1960년 당시 16세, 12세에 불과하던 명화, 경화를 줄리아드 예비학교에 보낸 어머니는 2년 뒤 명훈 등 다른 자녀들까지 모두 데리고 미국 이민 길에 올랐다.
넉넉했던 건 아니었다. 어머니는 시애틀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며 아이들을 뒷바라지했다. 어머니는 집안 형편을 솔직하게 알리고, 어려움도 체험하게 하며 아이들에게 책임감을 심어주었다. 레슨이 없는 시간이나 방학 때면 명화, 경화, 명훈은 식당에서 서빙과 설거지를 돕곤 했다.
줄리아드에서 플루트를 전공하며 미국에서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장녀 명소(2007년 작고)의 도움으로 정경화는 줄리어드 음악원 예비학교에 오디션을 보고 전설적인 바이올린 교수 이반 갈라미언에게 배울 수 있었다.

미국 생활은 쉽지 않았다. 언어의 장벽은 높았다. 당시만 해도 드물었던 동양인 정경화는 늘 뉴욕의 이방인이었다. 자신이 가진 재능의 칼이 동료와 선후배들보다 더욱 날카롭게 벼려져야 한다는 사실을 역력히 깨달았다.

온종일 연습에 매달렸다. 한 음이라도 틀리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히스테리를 품은 완벽주의였다. 실수한 날이면 집에 가서 20시간 동안 같은 곡을 계속 연주한 적도 있었다. 갈라미언은 엄한 스승이었다.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줄리어드를 그만 둔 제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부지런히 자신을 연마하는 정경화에게 갈라미언의 방식은 그녀가 원하던 바로 그것이었다. 이 시기 정경화의 연주는 두드러질 정도로 무르익었다.

줄리어드 유학시절 실력 무르익어

정경화는 소련에서 열리는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콩쿠르에 참가하기를 원했지만 냉전에 막혔다. 1967년 그 대신 레벤트리트 콩쿠르에 참가했다. 거장 이차크 펄만이 우승했던 저명한 대회다. 많은 사람들과 이반 갈라미언까지 정경화의 참가에 반대했다. 갈라미언의 제자이기도 했던 핀커스 주커만도 참가 의사를 표명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음악계를 주무르는 유태인 파워의 우두머리격인 아이작 스턴으로부터 후원 받고 있던 주커만의 우승이 유력했다.

이를 악물고 나간 정경화의 바이올린이 빛났다. 파죽지세로 최종무대까지 올랐고 핀커스 주커만과 최종 1인을 겨뤘다. 심사위원들은 1위를 결정 못 했다. 아이작 스턴은 정경화와 주커만에게 한 번씩 더 연주하도록 주문했고 두 후보는 그대로 했지만 결국 레벤트리트 역사상 최초로 정경화와 주커만, 두 명의 공동우승자를 냈다. 사실상 정경화의 승리엿다.
콩쿠르 우승 직후 정경화의 커리어가 시작됐다. 갈라미언은 이때 제자가 연주회로 재능을 한꺼번에 써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스위스에 머물던 요제프 시게티에게 배울 것을 권했다. 시게티는 정경화의 바이올린 연주기법을 정제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음악과 예술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혀 주었다. 스승은 정경화에게 독서를 권하며 미술관에 가 보라고 했다. 이 때의 아카데믹한 체험으로 정경화는 회화, 조각 등 비주얼한 예술적인 표현을 음악적인 언어로 변용하는 방법을 나름대로 배웠다고 한다.
1970년 이차크 펄만이 출산하는 아내를 돌보느라 런던으로 건너갈 수 없게 됐다. 공연이 거의 임박해서야 정경화에게 런던 심포니에서 대타 의뢰가 왔다. 런던 심포니 단원들은 22세의 정경화를 쌀쌀맞게 대했다. 리허설 전날 정경화에게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하겠다고 알렸던 런던 심포니는 리허설 당일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경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멘델스존 협주곡을 완벽하게 연주했다. 그때부터 단원들의 마음이 바뀌었다. 리허설은 순풍에 돛단 듯했다. 정경화가 앙드레 프레빈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와 로열 페스티벌홀에서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한 데뷔 무대는 자선 연주회로서는 이례적으로 런던 신문들에 평이 실렸다. “지네트 느뵈 이후로 이런 멋진 바이올리니스트를 들어본 적 없다”는 찬사를 받으며 대성공을 기록한다.

레벤트리 콩쿠르 우승으로 이름 알려

이후 연주회 요청이 쇄도했다. 데카 레이블에서 독점 레코딩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이었다. 1년에 100회 이상의 연주를 하며 보낸다. 앙드레 프레빈이 지휘한 런던 심포니와 협연해 차이콥스키 협주곡과 시벨리우스 협주곡을 녹음한 데카에서의 레코딩 발매로 정경화는 국제 무대에 성큼 발걸음을 내디뎠다.

시벨리우스/차이콥스키 협주곡 이후 프레빈 지휘 런던 심포니의 월튼/스트라빈스키 협주곡, 프로코피예프 협주곡 1번 2번, 키릴 콘드라신 지휘 빈 필의 베토벤 협주곡 루돌프 켐페 지휘 로열 필의 브루흐 협주곡 1번/스코틀랜드 환상곡, 로렌스 포스터 지휘 런던 심포니 생상스 협주곡 3번/비외탕 협주곡 5번, 게오르그 숄티 지휘/런던 필의 버르토크 협주곡 2번, 엘가 협주곡, 샤를 뒤투아 지휘 로열 필의 생상스/라벨/쇼송, 뒤투아 지휘 몬트리올 심포니의 차이콥스키/멘델스존 협주곡, 생상스 협주곡 1번/랄로 스페인 교향곡, 크리스티안 지메르만과 함께한 슈트라우스/레스피기 소나타(그라모폰상 수상), 필립 몰과 함께한 ‘콘 아모레’ 등 데카 시절 명연주들이 쏟아졌다.
피아니스트 필립 몰과 함께한 정경화의 '콘 아모레' 앨범(위)과 지휘자 사이먼 래틀과의 사진(아래)
1988년부터는 EMI로 이적, 클라우스 텐슈테트 지휘 런던 필과 베토벤/브루흐 1번 협주곡, 사이먼 래틀 지휘 버밍엄 시향과 버르토크 협주곡 2번 외(그라모폰상 수상) 등 명연주가 뒤를 이었다.

정경화는 2005년 발레리 게르기예프와 지휘한 키로프 오케스트라의 내한공연에서 왼손 네 번째 손가락 부상을 당한다. 이후 5년동안 줄리아드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2010년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가 지휘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내한공연에서 브람스 협주곡을 협연하며 재기를 타진한 뒤 2011년에는 ‘She’s Back’이라는 제목의 컴백 리사이틀을 가졌다. 이후 정경화의 인생 3막은 계속됐다. 2015년에는 브람스 협주곡 이후 15년만의 새 음반, ‘바이올린의 구약성서’로 불리는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워너 클래식에서 발매했다. 2018년에는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듀오 리사이틀을 열며 ‘46년차 앙상블’, ‘한국 클래식의 과거와 현재의 만남’으로 회자됐다.
2021년 김선욱과 듀오 리사이틀에서는 ‘동양의 마녀’라 불리던 때의 서슬 퍼런 찬바람은 더 이상 없었지만 절도 있는 자세와 맺고 끊음은 여전했다. 예전의 예민한 하이엔드는 아니었지만 편안한 의자 같은 여유가 감지됐다. 2023년 포항에서 본 김태형과 정경화의 연주는 놀라웠다. 브람스 소나타 2번과 그리그 소나타 3번, 프랑크 소나타에서 간결해진 프레이징과 야무진 대신 푸근한 여유는 여전했지만 고음역은 더욱 날카롭게 벼려졌고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디테일이 살아났다. 75세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는 고목에 돋아난 신록을 연상케 했다. 아시아 여성 최초로 도이치그라모폰과 계약한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는 정경화의 연주회를 보고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수많은 K-클래식의 후예들은 다름아닌 ‘정경화 키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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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태형 음악칼럼니스트(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