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량 생산 가능한 디자인을 가볍지 않은 예술로 승화시켰다

국제갤러리 김영나 개인전
산업디자인과 예술의 경계 허물어
회화, 조각 등 최근 작품 40여점 선보여
오는 6월30일까지 전시
산업 디자이너와 미술 작가의 경계는 존재할까. 이 질문에 대해 가장 많이 고민해온 작가의 개인전이 부산에서 관객을 맞이하고 있다. 국제갤러리 부산에서 열리는 김영나의 개인전 'Easy Heavy'가 그것이다. 김영나는 예술 시장에 뛰어든 2011년 이후 계속해서 산업 디자인과 미술을 결합하는 실험을 해왔다. 디자인과 순수 미술 사이에는 경계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두 장르가 만나면 각각의 영역이 확장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김영나는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했다. 졸업하고는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프린트되어 나오는 그래픽 디자인에 매력을 느껴 한 기업의 디자이너가 됐다. 그리곤 홀연히 네덜란드로 떠났다. 디자인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으면서다. 그곳에서 김영나는 네덜란드 디자인으로 일컬어지는 '더치 디자인'을 한국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김영나, Blank Sunset, 2023.
그는 스스로의 디자인 작업과 다양한 예술을 결합한 실험을 지속했다. 이번 전시에서도 그의 실험체들이 공개된다. 회화, 평면작업, 조각, 벽화까지 최근 김영나의 작품 40여 점을 선보인다. 김영나가 국제갤러리와 함께 선보이는 첫 번째 전시다. 이번 전시는 그래픽 디자인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 그 표현의 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김영나는 다양한 브랜드들의 러브콜을 받았다. 패션 브랜드 코스와 에르메스, 그리고 여러 미술관 아트숍과의 프로젝트들을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특정 사물과 재료가 의외의 상황에 놓였을 때 색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곤 생각했다. "익숙한 사물을 새로운 시공간에 배열했을 때 무슨 효과가 생길까?"

그는 자신에게 익숙한 디자인이라는 사물을 새로운 공간인 전시장으로 갖고 들어왔다. 미술, 건축, 공예와 그래픽을 결합했다. 이러한 그의 도전은 산업 디자인이 단순한 기능적 표현을 뛰어넘어 하나의 예술 장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알려주며 예술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김영나, Home 2, 2024.
대중들에게 흔히 그래픽 디자인은 수집이 가능한 기념품처럼 여겨진다. 공장에서 찍어내듯 대량생산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영나는 이러한 '대량생산 디자인'의 고정관념을 깼다. 만들어진 이미지들을 샘플링이나 재편집의 과정을 거쳐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재현한다. 이번 개인전 ‘Easy Heavy’에서는 제목이 가진 의미 그대로 '가볍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대상들을 모았다. 대량생산이 가능한 디자인을 가볍지 않은 하나의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다.

이번 전시는 크게 두 공간으로 나뉜다. 첫 번째 공간은 지금까지 김영나가 선보였던 대표 연작들을 보여준다. 두 번째 공간에서는 일상 속에서 쉽게 접하는 시각 디자인을 재편집해 새로운 작품 만들기를 시도하는 그의 최근 작업들을 소개한다.

첫 번째 공간에서는 김영나의 트레이드마크격인 연작 'SET'가 가장 앞에 놓였다. 이 연작은 개인 작업, 커미션 프로젝트, 전시 출품작 등 분야에 관계없이 그가 2006년부터 2015년까지 진행했던 작업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그는 단순히 샘플북을 만드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책 속 디자인을 직접 캔버스나 설치작으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책이라는 지면이 평면으로 옮겨지는 작업이다. 작업의 이름은 '피스'. 이번 전시에서는 피스 연작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김영나, Piece 14-2, 2020.
김영나는 그만의 디자인을 다양한 매체로 바꾸면서 디자인과 순수미술을 구분짓는 것이 구시대적인 생각임을 관객에게 주장한다. 부산 전시장에 들어설 때 가장 먼저 보이는 벽면에 설치된 'SET v.25: View N'는 기존 'SET' 작업에서 변형한 작품이다. 'SET'가 주로 책 지면의 높이와 벽 높이의 비율을 그대로 벽에 옮겨 재현했다면, 이번 신작은 이미지의 비율을 완전히 변형시켜 벽화로 만들었다.

함께 설치된 '조각 25-1'은 벽화의 일부를 다시 캔버스 위에 옮겨 그린 회화 작업이다. 마치 벽화의 일부를 따로 떼어놓고 보는 것과 같은 효과를 주기 위해서다. 이처럼 김영나의 작업은 ‘이미지’가 지면이라는 평면에서 벽이라는 또 다른 평면으로, 이후 전통적인 회화 매체인 캔버스로 옮겨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한쪽 벽면에 설치된 '발견된 구성' 연작에서는 A4, A5 사이즈의 판형에 수집한 인쇄물들을 가지고 새로운 작품을 만든 그의 실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김영나는 이 작업을 위해 일상에서 스티커, 포장지, 포스트잇, 봉투 등 일상 용품들을 수집했다. 말 그대로 '발견된 물건'들을 이용해 매일 밑그림을 그리고 스케치를 했다.
김영나, 194, 2023.
김영나에게 전시는 일종의 무대와 같다. 정해진 전시의 관습을 따르는 대신 공간의 골격이나 기능적 특징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이에 맞춰 작품을 만들고 설치한다. 전시장이라는 무대에서 그는 연출가가 된다. 두 번째 전시 공간에서 그의 연출가적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스쳐 지나가기 쉬운 전시장 출입구 부근의 기둥을 둘러싼 구조물에 주목했다.

구조물 상단에 스프레이 작업을 한 후 동일한 높이로 내부 전시장의 사면을 가로지르는 벽화 작업 'H1276'을 선보였다. 구조물의 높이지만 작품이 설치된 높이 1276cm를 작품명으로 지었다. 이렇듯 그는 건축물의 주어진 기능적 특징을 활용하고 이를 작업의 일부로 표현한다.

공간을 가로지르는 신작 'H1276'에는 기하학적 도형, 숫자, 알파벳 등이 무질서하게 배열되어 있다. 스티커나 표지판처럼 대량생산되어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시각 언어를 캔버스와 아크릴, 석고 등의 다양한 재료와 접목시켰다.
김영나, Good Job, 2023.
실제로 김영나는 아주 오랜 기간동안 그래픽 디자인이 가득한 스티커들을 강박적으로 수집해왔다고. 그는 스티커 속에 담겨 있는 지시문이나 기능적 문구에 의외의 편집 과정이나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재가 더해지면 재미있는 결과물이 나온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돈을 내라'는 독촉의 지시문을 담고 있는 '파이널 노티스'는 강렬한 색과 유광 대신 포근한 모직 소재를 쓰며 반전을 줬다. 이처럼 기존의 맥락을 벗어난 작품의 형태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예상치 못한 작품 세계에 놀라움을 불러일으킨다.디자인과 미술 사이를 오가며 그 세계를 넓히는 작가. 다양한 소재와 구조를 시도하며 관객들에게 놀라움과 충격을 선사하는 실험가. 그가 남긴 발자취와 새로운 실험은 국제갤러리 부산에서 6월 30일까지 펼펴진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

핫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