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로, 사회비판으로, 남성 솜씨로… 틀을 깨는 자수 다 모였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근현대 아우르는 40여명 작가들
170여작품과 50여점 아카이브 공개

자수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전시
최유현 자수장의 작품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오늘날 자수(刺繡)라고 하면 여성들이 규방에서 소소하게 즐기던 여가 수단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자수는 그 종류도 다양하며 역사에 따라 변하기도 했습니다. 근대에는 여성의 자유와 해방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어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을 기획한 박혜성 학예연구사는 전시 소개를 시작하며 이렇게 말했다. 대중과 관객이 가진 자수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싶다는 것,
양기훈 외, 자수 송학도 병풍, 국립고궁박물관
이번 전시는 여성들이 규방에서 즐기는 문화로 치부되던 한국 근현대 자수를 하나의 현대예술로 재조명한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잘 소개되지 않던 자수 작품들만 모아 소개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전국을 뒤져 근현대를 아우른 40여명 작가들의 170여 작품과 50여 점의 아카이브를 모았다.
서울 중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리는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전시 전경.
이번 전시는 4개의 공간에서 4부의 구성으로 진행된다. 첫 공간 1부에서는 19세기 한국 전통자수 유물을 선보이고, 2부에서는 일제강점기 도쿄 여자여자미술대학에서 나온 자수 등 근대 자수에 집중한다. 3부에서는 한국 최초의 대학 자수과인 이화여자대학교 자수과 졸업생들과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참여한 자수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며 추상미술 자수 등 다양한 자수 작품을 살핀다. 4부에서는 60~70년대 산업화 시대속 하나의 상품이 됐던 자수 작품들을 소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같은 주제를 다루더라도 쓰는 재료와 작가에 따라 느낌이 완벽히 달라지는 자수의 세계를 관찰할 수 있다. 십장생 등 장수를 표현한 자수, 나무와 학 원앙 연꽃 꿩 등 짝을 모티브로 한 작품들이 대부분이지만, 같은 도상과 상징이라도 작품과 시대마다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자수는 비슷하다'는 고정관념을 꺴다,
안제민, 자수 지장보살도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남성 작가들의의 자수 작품도 소개됐다. 평안도 안주 지방의 이름을 따서 지은 남성 자수장인 집단 '안주수'의 작업들이다. 이 그룹에 속했던 장인 안제민이 1917년에 작업한 '자수 지장보살도'는 절 밖에서 관객을 처음으로 만나는 작품이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소장하고 있는 그의 2m 높이 작품 ‘자수 준이종정도 병풍’도 이번 전시를 위해 국내로 들여왔다.
송정인, 작품 A, 작가 소장
이번 전시에서 가장 주목하는 작가 중 하나는 송정인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전시장 한 켠을 전부 송정인의 작품으로만 메웠을 정도다. 그는 도우미나 스승 없이 오직 혼자서만 작업을 해 온 작가다. 부산에서 활동했던 송정인은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다. 열악한 상황에서 스스로 새로운 자수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탐구했다. 아래를 보고 수놓는 자수의 작업 방식에서 벗어나 벽에 걸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작업을 한다거나, 부산 화랑을 돌아다니며 본 현대미술 작업들을 자수에 적용하기도 했다.

현대 작가들의 자수 작업들도 전시장 한 곳에 모았다. 이장봉의 작품에는 전쟁에 이북에 두고 온 딸에 대한 그리움이 그대로 묻어 있다. 작가로서의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자수의 특성상, 스스로의 인생을 담은 작업을 했다는 것이 다른 작가들과의 차별점이다. 자수를 사용하는 현대미술 작가 중 가장 유명하다고 알려진 함경아의 작품도 마련했다. 그는 남북 관계에 대한 질문을 작업으로 만드는 작가다. 작업은 중국을 통해 함경아의 그림을 북한으로 보낸 뒤 북한의 자수 장인들이 그 위에 작업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완성된 작품은 다시 중국을 통해서 들여오는 위험한 방법을 쓴다.
서울 중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리는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전시 전경.
나가는 길에는 무형문화재가 된 자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추상적인 자수 작업이 유행하다 다시 전통 자수가 부활한 과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이 때부터는 각 자수 작품에 이름도 붙었다. 부처의 삶을 8개의 자수로 만든 작업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 작품은 통도사에 있는 팔상도 회화를 모티브로 따 온 자수 작업이다. 대형 작품 속 인물들의 표정이 한땀한땀 다채롭고 세밀하게 표현됐다.

자수는 관객이 어떤 조명에서,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작품의 빛깔이 완전히 달라진다. 회화와 달리 자수 작품만이 줄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사진으로 보는 것이 아닌 직접 전시장을 찾아야 변화가 주는 아름다움을 느껴볼 수 있다. 전시는 8월 4일까지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