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인이 쳐들어와도 지그시 눈 내리깔고 우릴 구해줄, 에밀리

[arte] 오동진의 여배우 열전 - 에밀리 블런트
영화 <정글 크루즈>에 출연한 배우 에밀리 블런트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올해로 41살인 영국 런던 출신의 에밀리 블런트가 세칭 ‘뜬 것은’ 10년 전인 서른한 살 때이다. 늦었다면 늦은 나이이고 빨랐다면 빠른 나이이다. 그때 그녀는 <엣지 오브 투모로우>에서 두각을 보였다. 솔직히 톰 크루즈의 세계적 명성에 얹혀간 감이 있긴 하지만 배우는 그런 식으로 처음에 시선을 당겨 모으는 법이다. 에밀리 블런트는 <엣지 오브 투모로우>의 성공으로 월드 스타로 진입하고 드니 빌뇌브의 영화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로 정점을 찍었다. 그리고 뒤이어 나온 <콰이어트 플레이스>로 스스로의 스타급 여왕의 자리를 완전히 세팅했다. 블런트는 그다지 절세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늘 매력 있는 캐릭터를 소화한다. 무엇보다 연기력이 좋다. 그게 에밀리 블런트가 인기를 유지하는 비결이다. 믿고 보는 연기자란 얘기다.

에밀리 블런트를 보고 있으면 시고니 위버가 생각이 난다. 여전사型이고 강한 모성성을 내뿜는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에서는 장교였다가 강등돼 ‘찐따’ 병사가 된 톰 크루즈와 타임 슬립을 해 가며 외계 생물과 싸운다. 최강의 정예 요원 역이다. 강한 여성상을 표현해 내는 데 있어서 블런트의 각진 얼굴은 큰 몫을 한다. 동그란 눈이 아니라 약간 흘기듯 죽 찢어진 눈매도 여성들의 잠재된 파워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에밀리 블런트는 20대 여성보다는 30대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다. 특히 커리어 우먼들, 회사에 다니는 화이트칼라 여성들이 에밀리 블런트를 좋아한다. 그녀처럼 당당하게 조직과 세파에 맞서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영화 &lt;엣지 오브 투모로우&gt;의 에밀리 블런트 포스터 ⓒ다음 영화
영화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에서 블런트는 처리해야 할 범죄 현실과 원칙과 도덕, 법 집행의 매뉴얼 사이에서 고민하는 FBI 요원으로 나온다. 케이트(에밀리 블런트)는 컬럼비아 카르텔 출신의 히트맨 알레한드로(베네치오 델 토로)가 초법적 살인과 고문을 일삼고 CIA 특수요원인 맷(조슈 브롤린)이 이를 묵인하자 큰 혼란에 빠진다. 맷은 케이트에게 작전 중 소리 지른다. “우리는 적을 섬멸하는 게 목적이 아냐! 그들을 관리하는 거야. 우리의 시스템으로.” 에밀리 블론트는 멍한 표정을 짓는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줄곧 멍때리는 표정의 연기를 잘한다. 네 말은 틀려. 근데 반박할 수는 없네, 하는 표정. 소위 쩝쩝거리는 표정이다. <시카리오>에서 이 장면은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에밀리 블런트의 여러 이미지를 영화 속에 콜라주 해낸다. 케이트는 단호하고 강단이 있는 수사관이고 디테일이 강한 영민함을 지녔지만, 그래서 정예 요원이 됐지만, 마음속으로는 때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연약한 여성이기도 하다. 케이트는 중간에 테드(존 번달)라는 남자에게 깜박 속아 넘어가고 침대까지 가기 직전 돌변한 남자에게 거의 맞아 죽을 뻔 하는 일을 겪는다. 쯔쯔, 여자나 남자나 유혹 앞에 장사가 없다.
영화 &lt;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gt; 속 에밀리 블런트 ⓒ네이버 영화
실제 남편이고 영화 속에서도 남편으로 나오는 존 크래신스키 감독이자 배우의 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 1편(2018)에서 에밀리 블런트는 모성의 끝판왕을 보여주고, 그래서 손에 땀을 쥐게 하며, 당연히 관객들로 하여금 스스럼없이 영화 속의 그녀에게 신의 가호와 은총이 가득 내리기를 기원하게 만든다.1편에서 에벌린 역의 블런트는 출산을 앞두고 있다. 그녀는 이미 리건(밀리센트 시몬스)과 마커스(노아 주프), 남매 둘이 있다. 막내는 죽었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만 나도 달려들어 가차 없이 사냥의 대상을 잡아먹는 외계의 이상 생물에게 자신의 눈앞에서 죽었다. 다른 자식도 아니고 막내를 잃은 엄마는 평생 가슴의 멍을 지우지 못한다. 이 여자가 또 다른 아이를 가진 것은 어쩌면 죽은 막내에 대한 죄의식이다. 에벌린은 곧 출산을 해야 한다. 문제는 출산에는 ‘소리’가 따른다는 것이다. 아이를 낳을 때의 산모의 비명은 어떻게든 혼자서 이를 악물고 참는다 치고 태어난 아기는 궁둥짝을 때려 울게 해야 한다. 그 소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는 바로 그 소리의 서스펜스, 긴장감이 최고인 작품이다. 존 크래신스키의 상상력과 연출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얘기를 옆길로 새게 해서 잠깐 딴 얘기를 하나 하면, <콰이어트 플레이스>는 트럼프 시대에 나온, 일종의 ‘입틀막’ 정부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되 그것을 우회적으로 해내고 있는 작품이다. <콰이어트 플레이스>의 메타포는 꽤나 정치적이다. 소리만 내면(정치적으로 반대의 소리를 내면, 특히 언론이 그러면) 와서 잡아 죽이는 외계 생물은 트럼프를 빗댄 것이었다….. 라고 생각하는 건 이 세상에 당신밖에 없다고 해도 반박은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생과 세상은 늘,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갈 뿐이다. 옆길 토론 끝.
영화 &lt;콰이어트 플레이스&gt; 속 에밀리 블런트 ⓒ네이버 영화
에밀리 블런트의 영화 중 매력적인 영화는 사실 그다지 유명한 작품이 아니다. 그중 베스트는 <사막에서 연어낚시>이다. 원제 ‘Salmon Fishing in the Yemen’에서 예멘이 빠졌다. 이건 매우 중요한 누락인데 예멘은 왕정 독재국가이다. 인권이 유린당하는 곳이지만 중요한 나라인 이유는 오로지 석유 때문이다.영화는 예멘의 왕자가 사막에 물을 대 대규모 저수지를 만들라는 영국 해양수산부에 요청을 하는데 그 이유는 거기서 연어 낚시를 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분명 ‘미친 독재 왕자’의 생각이지만 영국은 어류학자 존스 박사를 파견하고 그를 통제하는 여자가 바로 이 프로젝트의 투자 컨설팅을 맡고 있는 해리엇, 에밀리 블런트이다. 둘은 어찌어찌 싸우기도 하고, 간을 보기도 하다가, 그러니까 썸을 타다가 연애를 한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남녀 간의 감정은 오만 군데에서라도 꽃피워지는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저 인간들 지금 저럴 때인가, 미친 왕자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느라 예멘 사람들이 고통을 받을 거라는 것, 박사와 투자 컨설턴트라는 지식인들이 저럴 수 있을까 하면서도 그 둘이 애정의 싹을 틔우는 게 이상하게 밉상은 아니다.
영화 &lt;사막에서 연어낚시&gt; 스틸컷 ⓒ네이버 영화
감독은 라세 할스트롬이고 초창기에는 <길버트 그레이프>와 <사이더 하우스>, <초콜렛> 등 수작을 만들었지만 요즘은 강아지 영화(<하치 이야기>, <안녕 베일리>)나 만드는 감독으로 전락했다. 강아지 영화가 뭐 어때서! 아무튼 영화 <사막에서 연어낚시>에서 에밀리 블런트는 여성에게 투피스 정장은 참으로 댄디하고 아름다운 의상이라는 확신을 심어 준다. 내 여자에게 종종 정장을 입으라고 요구하고 싶게 만든다.
영화 &lt;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gt;에서 세미 정장을 입은 에밀리 블런트 ⓒ네이버 영화
다소 오래된 영화이지만 베네치오 델 토로와 함께 나온 <울프맨>(2010)이란 영화에서 에밀리가 맡은 그웬이라는 여성은 시아버지(안토니 홉킨스)에게 물려 늑대인간이 된 시동생 로렌스를 애정하게 된다. 측은지심을 갖는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문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늑대를 인간처럼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웬은 자신의 코르셋 안에 담겨져 있는 것이 욕망인지 사랑인지 헷갈려 한다. 영화 <울프맨>의 서사는 다소 엉망진창 왔다리갔다리 하지만(늑대 부자가 서가에서 한바탕 싸우는 장면은 많이 지루하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얘기한다지만 진부하다.) 빅토리아 시대 의상을 입은 에밀리 블런트는 여지없이 고즈넉하다. 역시 영국 출신이라 의상 소화력이 남다르다는 느낌을 받는다.
영화 &lt;울프맨&gt; 스틸컷 ⓒ네이버 영화
폴라 호킨스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걸 온 더 트레인>(2017)도 블런트 출연의 수작이다. 미스터리 스릴러이다. 블런트는 여기서 살인을 목격한 알코올 중독자 레이첼로 나온다. 살인은 일어났는가. 그녀의 환각 아닌가. 이야기는 꽤나 복잡하게 진행된다. 레이첼은 결국 사건 해결에 큰 역할을 해낸다. 에밀리 블런트 말고도 레베카 퍼거슨이 나오고 매력 있는 배우가 많이 나오는 영화이다. 영화 속 레이첼이 타고 다니는 통근열차는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경의선이다. 아니면 수원행 무궁화호 열차 같은 것이다. 기차 안에는 참으로 별난 사람들이 다 타고 있다. 유의할 일이다. 에밀리 블런트의 술에 취한, 멍한 표정이 일품이다. 술 취하면 사람들 표정이 대체로 저렇다.

미국 메이저 배급사인 유니버설의 작품으로 현재 극장가에 걸려 있는 <스턴트맨>에서 에밀리 블런트는 다소 소비됐다는 느낌을 준다. 에밀리 블런트가 아니라 마고 로비가 더 어울렸을 것 같은 영화다. 실망스럽다. 에밀리 블런트라면 자신의 젖가슴 사이에 어린 아기를 착 둘러 안고 괴물과 싸우는 전사(戰士)의 엄마 역이 맞다.

대단히 아름답지만(잘생겼지만) 살기에 피곤한 여자(남자)가 있고, 그다지 최고 미인(남) 소리는 못 듣지만 둘 사이의 대화가 찰지고 내 아이를 잘 키울 것 같은 여자(남자)가 있다면 선택은 당연한 것이다. 인생과 여자 혹은 남자는 다 그런 것이다. 에밀리 블런트를 30대 여성, 40대 이상의 남자들이 좋아하는 이유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영화 &lt;걸 온 더 트레인&gt;(위)과 영화 &lt;스턴트맨&gt;(아래) 속 에밀리 블런트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