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 마티네즈는 끊임없는 드로잉으로 세상과 자신을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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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장욱의 청춘이 묻고 그림이 답하다
선 위에서
샤피 펜으로 구불구불 그은 선이 형태를 만든다. 화분이나 버섯, 테니스공 같은 사물뿐만 아니라 테이블 혹은 스튜디오 같은 공간은 종이 위에 겹쳐지거나 나뉘어 새로운 형태로 재탄생한다. 작가의 정신은 펜 끝에 쏠려 있지만 가끔은 드로잉의 속도감 때문에 의식이 선 밖으로 미끄러졌다가 돌아오길 반복한다. 그에게 드로잉은 현실을 벗어나는 통로인 동시에 낯선 환경과 자신을 연결하는 선이다. 의식과 무의식, 입체파와 코브라그룹, 추상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 카툰과 명화, 힙합과 클래식, 부유하는 역사와 기억의 파편들은 에디 마티네즈라는 필터를 거쳐 캔버스 안에서 조각나고 은폐되며 새롭게 드러난다.길 위에서
에디 마티네즈는 1977년 코네티컷주 해군기지에서 태어났으며 뉴욕 브루클린에 정착하여 작업 중이다. 부모님을 따라 여러 도시로 이주하며 살던 그는 양친이 이혼한 후엔 미국의 양쪽 해안을 오가며 주거지에 변화를 겪었다. 이때 떠돌며 살던(nomadic) 기억은 2014년 콘 갤러리(Kohn Gallery)에서 열린 개인전 타이틀 ‘Nomader’에서도 잘 나타난다.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옮겨 다닐 수밖에 없었던 현실에 맞서 그는 끊임없이 Nomader(No Matter: 문제없어)를 속으로 되뇌었을 것이다. 생의 불확실성 앞에서 그는 흥미로운 오브제나 기억을 채집하거나 일기처럼 드로잉을 하며 자신의 직관을 키워왔다.그는 미술대학에 진학했지만 일 년 뒤에 중퇴하며 제도권 미술 교육에서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미술관에서 아트 핸들러로 일하면서 누구보다 가까이 미술 작품에 다가갈 수 있었다. 오래전 수집한 미니어처 화분은 그가 화분 그림을 그리게 된 단초를 마련하고, 그림을 위해 항상 가지고 다니던 수정액(Wite-Out)은 향후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지우기와 만나 화이트 아웃(White Out) 페인팅의 실마리가 된다. 2013년 더 저널 갤러리(The Journal Gallery) 개인전 이후 에너지가 소진되었을 때 그는 창작의 벽 앞에서 6개월간 절필했다. 그때 거닐었던 롱아일랜드의 해변은 그가 작업을 평면에서 3차원으로 확장하고 창작의 한계를 넘어 추상회화로 한 발짝 더 나아가는 기틀이 된다. 조각가인 아내 샘 모이어(Sam Moyer)와의 사이에서 2019년 태어난 아서(Arthur) 역시 작가의 일상을 흔들며 새로운 작업에 영감을 주고 있다. 팬데믹 기간에 말문이 트인 아이가 잘못 발음한 나비(Butterfly)는 부플라이(Bufly) 시리즈의 시발점이 된다.
보물지도 혹은 마인드맵
에디 마티네즈의 작업 방식은 보물지도를 그리는 과정과 비슷하다. 탐험가들은 보물을 찾기 위해 보물지도 위에 자신이 발견한 주요한 단서들을 더하며 보물에 근접해 간다. 간혹 잘못된 정보로 길이 엉켜버렸을 때는 다시 몇 단계 앞에서 지도를 다시 그려간다.에디 마티네즈는 2015년부터 실크스크린을 활용했다. 자신이 그린 드로잉 중 선별한 작품을 캔버스 위에 실크스크린으로 인쇄하여 가이드라인을 만든 후, 그 뼈대 위에 다양한 색상과 기법으로, 같지만 다른 그림을 완성해 간 것이다. 이때 자주 등장하는 단서들은 블록헤드, 테이블, 풍선, 버섯, 테니스공, 화분 등이 있다. 가끔은 압정과 접착제 등을 통해 오래전 캔버스에서 오려 붙이기도 하고 때로는 한참 동안 그리지 않던 소재들 역시 최근작에 다시 등장하기도 한다. 생의 아이러니처럼 이 단서들은 긍정과 부정, 자신감과 콤플렉스처럼 그 경계를 넘나든다. 아름답지만 독을 품은 꽃이나 맛있지만 환각작용이 있는 버섯, 비슷해 보이는 스프레이 캔 안엔 페인트 혹은 살충제가 들어있다.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을 다시 꺼내 들춰보고 그곳에서 새로운 길을 찾는 그의 작업 방식은 길을 떠난 이후 밖이 아닌 자기 내면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수행자들의 태도를 떠오르게 한다. 그래서 그가 그리고 있는 그림은 보물지도인 동시에 사적인 도상들로 가득한 마인드맵이다.
만다라
티베트 승려들이 만다라를 제작하는 과정을 본다. 옴(Om), 가장 깊은 울림의 소리를 안으로 삼키며 손끝에서 떨어지는 모래에 집중한다. 잡념이 사라지고 세상에 오직 모래알만 존재하는 것처럼, 들숨과 날숨이 모래 한 알 한 알과 하나가 되는 찰나들이 모인다. 자신의 존재마저 잊게 되는 순간이 모여 마침내 드러나는 그림. 그렇게 수십일에 걸쳐 형형색색으로 화려하게 자리한 모래알들은 마치 식물이 가진 아름다운 패턴이나 꿀벌들이 만든 구조물에 비견할 만큼 조화롭다.만다라가 완성되고 그 성취감과 만족감이 가시기도 전에 승려들은 빗자루로 모래 그림을 쓸어낸다. 소유와 집착하는 마음 한 가운데 떨어지는 벼락. 만다라 수행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꿈이고 환상이고 물거품이며 그림자인 것을 몸으로 익히는 수련이다. 세게 움켜잡을수록 더욱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집착의 덧없음을 만다라로 경험한 승려들은 더욱 숙련된 솜씨로 새로운 만다라를 그리고 또 그릴 것이다. 티베트 승려들이 지운 모래 그림은 사라졌기에 새로운 가능성을 연다. 마치 에디 마티네즈가 드로잉 선을 지움으로써 새로운 길을 찾은 화이트 아웃(White Out) 시리즈처럼.에디는 2005년경 그렸던 만다라를 2016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스튜디오 조수가 발견한 자신의 옛 그림에서 다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작가가 그린 대형 만다라에는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부릅뜬 눈과 뱀을 비롯한 다양한 사물과 추상적 형태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 딱히 도드라져 보이게 묘사된 대상이 없이, 이들은 아주 평등한 형태로 큰 수레바퀴 안에 자리하고 있다. 마치 자신이 좋아하는 토핑을 잔뜩 올린 피자처럼도 보이는 그의 만다라는 그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그릇이자 시간을 가로지르는 포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