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항아리로 풀어낸 40년 보따리 여정, 파리에 거울왕국 지은 김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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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따리 작가’ 김수자, 파리 대표 미술관 피노컬렉션 전시폭넓은 흰빛의 세계와 형언하기 힘든 부정형의 원이 그려주는 무심한 아름다움. 서양에서 극찬하는 백자 ‘달항아리(Moon Jar)’의 미학이다. 이 아름다움은 그저 겉모습으로 그치는 게 아니다. 큰 대접 두 개를 빚어 위아래로 이어 붙여 하나의 순환하는 세계를 구축하는 제작방식이야말로 달항아리가 품고 있는 철학이다. 위와 아래가 하나 되고, 하늘과 땅이 조화롭게 맞아떨어진 듯한 모습 말이다. 2000년 넘게 천상의 이데아(idea)를 지상에서 실현하려 했던 서양인들은 어쩌면 달항아리의 이런 본질적 아름다움에 마음을 홀렸는지 모른다.
미술관에 메인 홀에 418개 거울 깐 대형작품 ‘호흡’ 선봬
달항아리처럼 두 공간을 연결, 파리 미술애호가 사로잡아
파리 한복판에 달항아리처럼 둥근 우주가
유럽 예술의 중심지, 프랑스 파리 한복판에 거대한 달항아리가 자리 잡았다. 19세기 프레스코화가 수놓은 돔 천장에서 빛이 쏟아지면 바닥을 빈틈없이 뒤덮은 거울이 이를 반사해 발아래 또 다른 돔을 만들어낸다. 하늘과 바닥이 빛으로 조응하는 이 공간에 선 인간은 우주를 유영하듯 끊임없이 사유에 잠긴다. ‘보따리 작가’ 김수자(67)가 파리 부르스 드 코메르스(Bourse de Commerce·BdC)-피노 컬렉션 미술관에 펼쳐낸 무한한 우주다.BdC는 파리 중심가 1구에 위치한 미술관이다. 보테가 베네타, 발렌시아가 같은 명품 브랜드를 소유한 케링 그룹 창업주인 동시에 미술품 옥션 크리스티를 소유하고, 스스로가 1만여 점의 작품을 소장한 미술계 ‘큰 손’ 프랑수아 피노(88)가 세웠다. 18세기 곡물 거래소로 쓰였던 건물을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리모델링해 2021년 문을 열었는데, 금세 파리의 명소로 자리매김했다.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현대미술관이라는 명성답게 지금 이곳에서 열리는 전시는 매번 화제였다. 오는 9월 2일까지 열리는 기획전 ‘흐르는 대로의 세상’은 그중에서도 가장 화려하다. 제프 쿤스, 마우리치오 카텔란, 데미안 허스트, 신디 셔먼, 피터 도이그 등 거장 반열에 오른 동시대미술 작가 29명(팀) 작품을 총망라했다. 이런 작가들 사이에서 김수자는 전시를 대표하는 메인 작가가 됐다. ‘카르트 블랑쉬(Carte blanche·백지수표)’, 작가 마음대로 미술관을 대표하는 공간을 꾸밀 수 있는 ‘전권 위임’ 권한을 파격적으로 받았다.
‘보따리 작가’ 김수자와 418개 거울
김수자는 1990년대 초반부터 존재감을 드러내 온 예술가다. 어머니와 이불보를 꿰매던 데서 영감을 얻은 ‘바느질’과 이주, 문화의 충돌과 만남, 삶과 죽음을 뜻하는 ‘보따리’를 정체성 삼은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1997년 색동 보따리를 트럭에 가득 싣고 11일간 이동하는 퍼포먼스로 글로벌 미술계에 반향을 일으켰다. 자기 몸을 바늘에 비유해 세계 곳곳을 떠돌며 사람과 삶의 궤적들을 엮었다.이번 전시는 40여년간 이어진 보따리 여정에서 얻은 깨달음을 달항아리의 개념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김수자의 예술적 완성도를 눈에 담을 수 있다. 백미는 높이 9m, 지름 29m의 원형 실린더 콘크리트인 로툰다홀 전시관에 설치된 ‘호흡(to breath)’이다. 홀을 통째로 비우고 바닥에 418개의 거울을 깔았다. 지난 2일(현지 시각) 미술관에서 만난 김수자는 “돔 구조의 로툰다홀을 보자마자 거울을 떠올렸다”고 귀띔했다. 모든 것을 품은 그의 보따리처럼 전시장을 하나의 ‘건축적 보따리’로 보고, 공간을 하나로 묶어낸 것. “우리 전통의 달항아리를 보따리 개념으로 치환시켰다”는 김수자는 “두 반구를 이어 달항아리를 만드는 것처럼 (로툰다홀이) 하나로 연결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안도 다다오의 사유와 공명하는 공간
직접 둘러본 호흡은 공백과 무한의 건축을 탐하는 안도 다다오의 사유와 공명하고 있었다. 노출 콘크리트 벽과 바닥의 거울, 천장의 프레스코화의 묘한 대치 속에서 파리지앵들은 벽에 기대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드러누워 바닥에 비친 하늘에 몰입하며 김수자가 비워낸 공간을 채웠다. 김수자는 이런 관람객들의 모습에도 크게 만족한 듯 “관람객들은 하늘과 땅 사이 직립해 시공간의 축으로 작용한다”면서 “그간 보따리 안에 쌌던 삶의 애환이 담긴 헌 옷처럼 이 건축적 보따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휴머니티(Humanity·인간성)는 그 자체로 퍼포먼스가 된다”고 했다.로툰다를 둘러싼 24개 쇼케이스에 든 흑백의 보따리, 달항아리 같은 오브제와 지하 전시장에 자리 잡은 메타페인팅, ‘바늘 여인’ 등 영상작품 등 44점의 작품들도 재미를 준다. 김수자의 대표작을 선보인다는 입소문이 퍼지며 매일 관람객으로 붐비는 이유다. 엠마 라빈 BdC 미술관장은 “건축물이 가진 18세기 유토피아적 철학과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만든 공간의 의미에 김수자의 전시가 어우러져 연금술처럼 새로운 분위기가 만들어졌다”며 “전시 개막 후 하나의 현상이라 할 만큼 굉장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말했다. 파리=유승목 기자※김수자 작가와의 인터뷰를 포함한 글 전문은 5월 27일 창간하는 아르떼 매거진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