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통달한 칠순의 예술가…"익명에 숨은 범죄자들, 다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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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구겐하임 어워드 수상자 슈리칭LG와 구겐하임 미술관은 올초 두 번째 ‘LG 구겐하임 어워드’ 수상자를 발표했다.
그녀의 '넷 아트'에 담긴 세가지 키워드
AI 작가가 아닐까 하는 예상을 뒤엎고 70세의 노장이 선정됐다. 대만계 미국 작가 슈리칭이다.글로벌 기업과 유수 미술관이 기술을 바탕으로 혁신적인 예술 활동을 펼치는 작가를 발굴, 지원하기 위한 상인 만큼 이 상에 대한 관심이 집중됐다. 슈리칭은 1990년대부터 인터넷 공간에서 디지털 예술을 실험한 이른바 ‘넷 아트(Net Art)’의 ‘시조새’로 꼽힌다. “기술은 예술의 도구”라고 말하는 그는 VR, 소프트웨어디자인, 코딩과 같은 최신 기술을 자신의 작품에 적극 활용한다.
그러나 그가 읽어내는 것은 이같은 화려한 기술의 향연이 아니다. 현실세계와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는 가상세계에서, 인간 사회의 폭력적인 면에 초점을 맞춘다. ‘익명’이라는 가면 아래 너무 손쉽게 자행되는 극단적인 성차별과 인종주의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사람들은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쉽지 않대. 사실 나도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알려고 노력하는 중이야(하하)”
● 조작된 현실
우린 '디지털'이란 감옥에 갇혔다
슈리칭 하면 ‘브랜든’(1998-1999)을 대표작으로 꼽는다. 구겐하임 미술관이 커미션한 인터넷 초창기 시절의 웹 아트로, 미술관의 영구소장품이기도 하다. 브랜든은 1993년 미국 네브래스카에서 트랜스젠더 남성인 ‘브랜든 티나’가, 원래 여성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후 성폭행당하고 그 뒤로부터 일주일 만에 살해당한 사건에 주목했다. 1년 동안 이 사건에 대해 온라인에서 벌어진 토론을 수집했다. 이 토론을 직접 보려면 꽤나 공을 들여야 한다. 디지털 네이티브조차 길을 잃을 정도. 1990년대풍의 썸네일이 가득한 내비게이션 바 이곳저곳을 눌러야, 작가의 작업을 만날 수 있다. 롤 플레잉 게임의 갈래길과 숨은 퀘스트처럼, 작품을 읽어내기 위해선 여러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마치 ‘해킹’하듯 돌아다니다 보면 다양한 스크립트와 이미지를 만나게 된다. 브랜든 외에도 비슷한 사건들이 로스쿨 학생들의 케이스 스터디 자료처럼 정리돼 있다. 성폭행 과정을 자세하게 묘사하라는 경찰, 피해자의 항의에 “그저 조사하는 일반적 절차”라는 답변 등 업로드된 자료들이 너무나 적나라해, 지금도 읽기 버거울 정도다.원래의 목적된 바가 아닌, 전혀 다른 목적으로 쓸 수 있게 ‘조작’하는 ‘해킹’은 작가가 말하는 자신의 첫 번째 키워드다. 2019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대만관에서 선보인 ‘3X3X6’은 각 전시장에 설치된 6개의 카메라가 끊임없이 모니터링하는 3평방미터의 감옥을 은유한다. 외부를 찍어 내부자에게 보여주는 카메라가, 내부자를 찍어 외부에 보여주는 역할로 바뀐 셈이다. 관람객은 자신을 감시하는 카메라가 보내는 영상과 함께, 성적 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감금 당했던 10명의 영상도 함께 볼 수 있다.
슈리칭은 “물리적 감금도 있지만, 우리는 지금 소셜미디어나 CCTV 같은 것들에 둘러싸여 항상 감시당하고 있지 않나. 사회 전체가 디지털 파놉티콘(Panopticon·원형 감옥)이다”고 설명한다.
● 바이러스와 통제 사회
일상의 감시, 그리고 바이오공학의 민낯
슈리칭은 영화제작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근작인 ‘UKI’(2023)은 코로나19로 전세계가 멈췄던 기간, 작가가 고민했던 테마들이 녹아있다. 바이러스로 인한 질병이 퍼졌을 때 이를 다루는 국가권력의 작동방식, 사회 통제를 비롯해 바이러스 그 자체에 대한 궁금증과 인간 신체의 경계를 벗어나는 ‘바이오 공학’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UKI 시나리오는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 썼다. 나는 1980년대와 90년대를 뉴욕에서 보냈다. AIDS에 대한 공포와 그것을 다루는 국가의 방식은 SARS와 코로나19와 다르지만, 또 같은 부분도 있다. 정치적으로 이용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정부는 감염을 추적한다는 명목으로 개인의 일상을 통제하고, 제한하고, 감시했다.”
영화 UKI에서는 현실의 감시와 통제가 더 극대화한 세계가 펼쳐진다. 그 세계엔 성적 쾌락을 상품화하고, 인류를 착취하기 위해 유전자 조작과 데이터 수집을 자행하는 생명공학 회사 제놈과 이에 대항하는 폐기된 휴머노이드 ‘레이코’가 등장한다. 흥미진진한 공상과학 영화지만, 마냥 ‘상상력이 대단하다’고 추켜세우기엔 뒷덜미가 서늘하다.
● 괴짜 농사
경계 초월…농사 짓고 마늘코인 발행
그의 주요 관심사는 중 하나는 농업이다. 공상과학과 디지털 세계를 천착하는 동시에 실물 세계를 탐험하는 극단을 오간다. 스스로 ‘괴짜 농사’라고 부르는 프로젝트는 땅에 무엇인가를 심고 길러내는 것에 대한 경외와 이미 우리가 망쳐놓은 것들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함께 이야기한다.작가는 실제로 2000년경 마늘 농사를 지었다. 지인이 ‘마늘 한 알을 심으면 6알이 열린다’는 설명에 수익률 600%를 믿고 뛰어든 것. 원하던 대로 마늘을 수확한 그는, 이를 트럭에 싣고 ‘와이파이 공유 운동’에 나선다.
“마늘을 먹으면 다 먹고 나서도 입에서 냄새가 나서 마늘 먹은 걸 사람들이 알잖아.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지 않는 와이파이를 꼭꼭 숨기지 말고 개방해 달라고 유명 기관들을 다니며 설득했지.”
마늘과 와이파이 공유 운동의 기이한 동거는 이같은 시적 상상력에서 출발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마늘 화폐도 찍어냈다. 요즘으로 치면 ‘마늘 코인’을 만든 것. 이처럼 슈리칭의 작품세계는 바이러스와 같은 초미세 단위에서 글로벌 사회라는 거대 담론까지, 농사라는 실물세계에서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사이버 공간까지 종횡무진한다.아시아 여성으로 미국과 프랑스라는 서구사회에서 소수자이자 경계인으로 살았던 경험은 일반인이 생각지 못하는 독특한 시각을 제안하고 있다.
뉴욕=이한빛 미술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