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현우 기자의 키워드 시사경제] '경기선행지표' 구릿값 다시 고공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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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코퍼국제 구리 가격이 2년 만에 톤당 1만 달러를 뚫으며 고공행진하고 있다. 런던금속거래소(LME)에서 구리 선물은 지난달 26일 장중 톤당 1만31.50달러까지 올라 2022년 4월 이후 처음으로 1만 달러를 넘어섰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기록한 역대 최고가(1만845달러)와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국내 주식 시장에는 구리 가격에 연동해 수익률이 결정되는 상장지수펀드(ETF)가 여럿 거래되고 있는데, 4월 한 달 동안 일제히 10%대의 높은 수익률을 냈다.
데이터센터·자동차…급증하는 구리 수요
3대 비철금속의 하나인 구리는 ‘닥터 코퍼(Dr. Copper)’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구릿값을 보면 실물경기를 예측할 수 있다고 해서 ‘구리 박사’라고 부른다. 사용하는 산업이 워낙 다양해 국제 시세에 경제 상황이 반영되는 속성이 있어서다.구리는 전기와 열의 전도율이 은(銀) 다음으로 높아 전선, 배관, 전자기기, 자동차 등에 널리 활용된다. 그러면서도 가격은 은에 비해 훨씬 싸다. 전선은 제조 원가의 90%를 구리가 차지하는데, 만약 세상의 모든 전선을 은으로 만들어야 했다면 돈이 너무 많이 들어 전기 보급이 더뎌졌을 것이다.구리 가격이 강세를 보이는 것은 수요를 공급이 따라가질 못하고 있어서다. AFP통신은 “구리는 전기차와 태양열 패널, 풍력 터빈 등 재생에너지 전환에 두루 쓰이며 수요가 크게 늘고 있다”고 했다.
우선 ‘전기 먹는 하마’로 불리는 인공지능(AI) 산업이 구리 수요를 자극하고 있다. 국내외 빅테크 기업이 경쟁적으로 증설하고 있는 데이터센터에는 MW(메가와트)당 27톤의 구리가 사용된다. 전기차의 경우 모터는 물론 배터리의 핵심 소재인 음극재에도 구리가 필요하다. 전기차 한 대에 쓰이는 구리는 평균 83kg로, 내연기관차(21.8kg)의 3.8배에 달한다. 여기에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은 늘어나는 전력 수요에 대응해 전력망 개선 사업에 나서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라이스태드에너지는 “2030년까지 1800만 km의 전력망을 신설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구리가 3000만 톤이 필요하다”고 내다봤다.문제는 공급을 단기간에 늘리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구리 광산을 개발하려면 허가에만 최소 10년, 건설까지 마치려면 20년 이상이 걸린다. 세계 구리 제련 물량의 절반을 처리하는 중국에서 제련소들이 수익성을 보전하기 위해 감산에 나선 점도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톤당 1만 달러 돌파…“당분간 강세 전망”
구리는 칠레, 페루 등 남아메리카에서 주로 생산하고 중국에서 가장 많이 소비한다. 최근 중국 제조업이 좋지 않았지만 정부 차원의 경기 부양책이 잇달아 발표되면서 수요 회복에 대한 기대를 높이고 있다.금융시장 전문가들은 구릿값이 당분간 강세를 이어갈 것으로 보고 있다. 씨티은행은 “구리 수요가 2030년까지 지금보다 420만 톤 늘어날 것”이며 2025년 가격을 톤당 1만5000달러로 예측했다. 골드만삭스는 내년 상반기 구리 가격이 신기록을 경신할 것으로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