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쩜 이렇게 똑같지, 미국에도 오싹한 '홍콩할매'가 있었어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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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빨간 마스크를 쓴 여자가 다가와 묻는다. "내가 예쁘니?" 예쁘다고 대답하면 여자는 마스크를 벗는데, 여자의 입은 귀밑까지 찢어져 있다. '나랑 똑같이 해줄게'라며 입을 똑같이 찢어버린다. 한때 어린 아이들을 떨게 한 빨간 마스크 괴담, 도시전설이다.
美 민속학자가 수집한 전설 270편 수록
영화나 드라마 소재로 사용
누구나 한번쯤 등이 서늘해졌을만한 도시전설은 또 있다.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하굣길 초등학생을 골라 살해한다는 '홍콩할매 괴담'은 아이들이 등교를 거부하는 사태로까지 이어지면서 당시 뉴스에 나오기도 했다. 그밖에 동전 디자인에 숨겨져 있다는 '김민지 괴담', '자유로 귀신 괴담' 등 믿자니 근거가 부실하고, 안 믿자니 왠지 찝찝한 도시 괴담들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왔다. <도시전설의 모든 것>은 '도시전설'이란 개념을 처음 정립한 미국의 민속학자 얀 해럴드 브룬반드가 직접 수집한 도시전설 270편을 엮은 책이다. 브룬반드는 수십 년에 걸쳐 온갖 입소문부터 문학, 대중매체, 인터넷 사이트 등에서 이른바 '카더라 통신'으로 떠도는 이야기를 끌어모았다. 방대한 문헌조사와 연구 등을 통해 전설의 기원과 원형을 파고들어 유형화했다.
대부분의 도시전설은 끔찍한 범죄·사고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과 공포를 자극하는 형태를 띤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한밤중에 혼자 운전을 하다 주유소에 들렀다. 기름을 넣고 결제를 하려는데 주유소 직원이 멀쩡한 카드에 문제가 생겼다며 잠깐 사무실로 오라고 한다. 영문을 모른 채 차에서 내린 당신에게 직원이 속삭인다. "뒷좌석에 칼을 든 남자가 숨어 있어요!" 오싹한 전설은 '지인의 지인이 이같은 일을 겪었다더라'와 같은 양념으로 실체를 얻기 시작한다. 실제로 미국의 수많은 법 집행기관 산하 단체에선 '차를 탈 때 항상 뒷좌석을 확인하라'는 경고를 하기도 했다. 웃음이나 교훈을 주는 도시전설도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교훈은 자업자득 혹은 권선징악이다. 누군가 소중하게 안고 가는 상자를 보고 귀중품이라 생각해 이를 훔친 도둑이 상자를 열어 발견하는 건 죽은 고양이 시체라는 이야기, 와인병을 훔쳤는데 안에 들어 있던 건 소변 샘플이었다는 이야기 등이 대표적이다. 도시전설이 항상 허무맹랑한 건 아니다. 드물게 '진짜'에서 출발하는 것들도 있다. 코카콜라 병을 다 비우고 나서야 바닥에 있는 쥐를 발견했다는 전설은 1971년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코카콜라 병 안에서 생쥐 다리와 꼬리를 발견했다며 제기한 소송에서 출발했다. 이후 코카콜라를 비롯한 음료병이나 식품 용기에서 발견된 이물질에 관한 괴담이 쏟아졌다.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온 편지를 함부로 만지면 종이에 묻어있던 마약 성분이 몸에 스며들 수 있다는 도시전설은, 바닥에 떨어진 1달러 지폐를 주웠다가 펜타닐에 중독돼 전신마비를 겪은 실제 사례와도 연결된다.
브룬반드가 수집한 전설은 대부분 이역만리 미국에서 떠도는 전설이지만 그다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야기의 전파가 시공을 넘나든 결과일 수도 있고, 도시전설의 대부분이 인류 보편의 정서를 건들기 때문일 수도 있다. 미신과 민담 등을 소설의 주요 모티브로 삼은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 세대에서 저 세대로,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전해지며, 이 과정에서 아주 조금씩만 변형되는" 이야기들이 있다고 말했다.
도시전설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콘텐츠도 많다. 영화 '매드 맥스', '굿 윌 헌팅', 세계적인 밀리언셀러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등에도 도시 전설이 숨어 있다. 집 지하실에 주인도 모르는 누군가가 살고 있다는 설정의 영화 '기생충'도 미지의 침입자가 등장하는 도시전설에서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10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은 흡사 백과사전을 떠올리게 한다. 재미있으면서도 오싹한 이야기에 취하고 싶은 당신, 콘텐츠의 영감에 목마른 당신이라면 '도시전설 백과사전'을 펼쳐보라.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