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의 줄리엣, 깃털처럼 날아올라 비장하게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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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만에 고국 무대 선 발레리나 서희]사랑일까, 아닐까. 발레 <지젤(Giselle, 1841)>의 1막에서 지젤은 데이지 꽃의 꽃잎을 한 장씩 뜯으며 알브레히트와 자신의 만남이 사랑인지, 이뤄질 수 있는지 운명을 점친다. 차마 남은 꽃잎 한 장을 떼지 못하는 건 이루지 못할 사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브레히트는 숨겨놓은 꽃잎을 들이밀며 지젤의 마음을 달래는 센스를 발휘하지만 안타깝게 이 사랑은 배신과 죽음이라는 결과를 맺는다. 지젤의 손에 남겨졌던 그 꽃잎은 운명의 소용돌이를 예고하는 징표이자 복선이었던 것이다. 1965년 케네스 맥밀런(Kenneth MacMillan, 1929~1992)은 <로미오와 줄리엣(Romeo and Juliet)>을 안무하면서 비슷한 복선을 숨겨놓았다. 흔히 사랑은 그 마음을 확인하기 전까지가 가장 행복하다는 말이 있다. 그 마음은 확인되는 순간 사랑은 폭발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는 1막의 발코니 파드되가 그 부분이다. 어떤 버전의 발레 작품이라도 프로코피예프의 음악과 함께 이 발코니 파드되는 가장 로맨틱한 장면이다.케네스 맥밀런은 그 순간을 이렇게 표현한다. 로미오의 키스를 받고 행복한 마음이 복받쳐 발코니 위로 달려가 로미오를 향해 손을 뻗는 줄리엣. 로미오도 줄리엣을 향해 손을 뻗는다. 하지만 그 순간 두 사람의 손이 맞닿지 않는다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운명의 복선이 되기 때문이다. 케네스 맥밀런은 마지막 장면에서 단도로 자신을 찌른 줄리엣이 로미오의 시신을 향해 손을 뻗지만 끝내 그 손을 잡지 못하고 침대 위에 널브러진 채 죽음을 맞이하도록 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가장 중요한 두 장면에서 비극의 감정을 분출시키고 연결시킨 것이다.
유니버설발레단, 케네스 맥밀란의
줄리엣 역의 서희, 날개 단듯 부유하는 체공력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에너지 돋보여
그 사랑은 죽음을 통해 하나가 됐을까
수많은 <로미오와 줄리엣> 중 대표적인 안무작으로 꼽히는 마린스키 버전과 존 크랭코 버전의 발코니 파드되(2인무) 장면을 비교하면 이 점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마린스키 버전의 경우 두 사람의 포옹으로 맺어지고, 존 크랭코의 버전은 로미오가 줄리엣을 안아 발코니에 앉히는 낭만적인 모습으로 맺어진다. 가장 화사한 발코니 장면에서조차 케네스 맥밀런은 비극이 될 거란 예견을 읽게 만든 것이다. 서사가 강렬한 프로코피예프(Sergei Prokofiev, 1891~1953)의 발레 음악도 이 비극적 감정을 놓치지 않는다. 발코니 파드되를 주도했던 주제부는 두 사람의 죽어가는 엔딩 장면에 음울한 선율을 타고 깔려 들어가 있다. 음악을 통해 발코니에서 사랑을 확인하던 두 사람의 모습은 환영처럼 죽음의 그림자 위로 오버랩 되고 관객들은 울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다.이번 공연에서 음악을 맡은 지중배 지휘자는 이 곡이 발레 음악이자 두 젊은 남녀의 사랑의 물살을 타는 곡이란 점에 집중했다. 다소 연주가 흔들린 부분들은 아쉬웠지만, 감정과 상황이 변하거나 분출되는 지점마다 드라마틱한 해석을 보여준 점은 돋보였다.
▶▶▶[관련 칼럼=지중배] 로미오와 줄리엣은 화해와 평화를 남기고 별나라로 떠났겠지 이번 공연에서 첫날부터 관객들이 자리를 꽉 채우고, 티켓 구하기 어렵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서희 무용수의 힘이다.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의 간판스타인 서희, 다니엘 카마르고 무용수의 내한은 관객들에게 새로운 로미오와 줄리엣을 기대하게 했고, 과연 케네스 맥밀런의 작품을 어떻게 소화해낼 것인가 호기심을 자극했다.▶▶▶[관련 기사] 유니버설발레단 40주년…ABT 서희와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
유니버설발레단이 지난 2012년 케네스 맥밀런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공연권을 획득한 이후 가장 화제가 됐던 캐스팅은 2016년 알렉산드라 페리(Alessandra Ferri, 1963~)를 초청했을 때였다. 로열발레단에서 주역을 활동하던 시기 ‘줄리엣 그 자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이 작품에서 최고의 기량을 보여준 페리가 당시 오십을 넘긴 나이에 10대의 줄리엣으로 춤추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서희의 내한 공연도 그때 못지않은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기대에 부응하는 무대를 관객에게 선사했다. 기술적으로는 파드되 때마다 마치 보이지 않은 날개가 달린 사람처럼 하늘을 향해 부유하는 체공력을 보여줬고,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도 발끝까지 에너지를 짱짱하게 유지하며 발레가 원하는 정형미와 선을 놓치지 않았다. 특히 그 수려한 발등에는 시선을 떼기 어려웠다. 흔히 <백조의 호수>의 주역은 오데트와 오딜의 상반된 모습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고 말하지만, 그 못지않게 힘든 역할이 줄리엣이다. 철없는 10대의 모습에서 무도회에서 이성을 보고 설레는 감정에 눈을 뜨는 모습으로, 마음에 없는 사람과 결혼하라는 부모의 요구에 거절과 절망이 오가는 몸짓에서 자신의 사랑을 지키려 비장하게 약을 마시며 마지막 순간 연인의 뒤를 따라 죽음을 선택하는 모습까지, 줄리엣만큼 변화무쌍한 캐릭터가 어디 있을까. 서희는 그 감정의 변화를 정확하게 표현하면서 이번 공연을 이끄는 주축의 힘을 발휘했다. 로미오 역의 다니엘 카마르고는 1막의 전반부에서는 캐릭터에 완전히 녹아들지 못하는 면도 보였으나 발코니 파드되에서 폭발적인 감정선과 파드되 호흡을 드러내면서 제 페이스를 찾았고, 이후부터는 ABT 수석의 기량을 확실히 보여줬다. 그리고 머큐쇼 역의 이고르 콘타레프, 티볼트 역의 알렉산드르 세이트칼리예프, 벤볼리오 역의 임선우 무용수는 로미오의 든든한 받침대가 되었다.
이외에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눈여겨봐야할 장면들은 군무들이다. 드라마발레지만 고전발레가 갖고 있던 캐릭터댄스와 디베르티스망의 흥겨움을 가져와 무도회와 광장에서 펼쳐지는 춤사위 안에 담았다. 군무들은 격앙된 두 청춘남녀의 사랑 사이에서 관객의 감정을 완충하면서, 비극적 서사 사이에서도 관객을 무겁게 짓누르지 않고 화려한 에너지로 채운다. 16세기 르네상스 시대를 재연한 무대세트와 의상은 이 군무들 사이에서 시대의 감흥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번 공연에 ‘영원한 사랑의 성서’라는 캐츠프레이즈를 내건 만큼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로미오와 줄리엣>은 늘 빠지지 않고 이야기되고,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이 되어 왔다. 16세기 영국의 셰익스피어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쓴 문학은 러시아에서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으로 발레와 만나고, 20세기 영국의 케네스 맥밀런에 의해 새로운 안무작으로 탄생됐고, 21세기 한국의 무대에도 선보일 수 있게 됐다.그리고 올해 미국에서 활동하는 두 주역 무용수를 중심으로 또 한 번 한국의 관객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만났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름이 6세기에 걸쳐 많은 나라들 사이에서 사랑, 그리고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치환되는 걸 확인한 자리. 죽음으로도 맞잡지 못한 두 손은 무대와 객석 사이에서, 음악과 춤 사이에서, 이렇게 발레로 맞닿았다. /이단비 작가·<발레, 무도에의 권유> 저자
▶▶▶(과거 공연 리뷰) 죽음조차 아름다워…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이 객석까지 지배했다 [로미오와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