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선 의원서 시인으로 돌아온 도종환 "이제 문학으로 역할 할 때"

올해로 등단 40년…시집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출간
"지금은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 사방이 바닷속 같은 어둠입니다 (중략) 곳곳이 전쟁터이오니 / 당신 손으로 이 내전을 종식하여주소서"(시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에서)
'접시꽃 당신'의 시인 도종환(69)이 12년 간의 국회의원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 공직을 뒤로하고 다시 본래의 자리인 시인으로 돌아왔다. 그가 몸담은 21대 국회의 끝이 보이는 즈음 펴낸 시집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창비)은 12년간 정치인과 시인의 책무를 짊어진 도종환의 내면의 기록이다.

도 시인은 14일 서울 창비서교빌딩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거칠고 살벌한 정치판에서 신 시간과 고뇌의 흔적을 가을 물같이 차고 맑은 문장으로 담아내고 싶었다"고 했다.

표제시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은 가장 어두운 시간, 살벌한 죽음의 시간을 뜻한다. "지금 우리는 어둡고 사납고, 내면이 황폐한 죽음의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이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고뇌의 흔적을 담으려고 했어요.

어두운 시간에서도 성찰하는 사람이 시인이라고 생각합니다. "
표제시엔 이런 구절도 있다.

"비수를 몸 곳곳에 품고 다니는 그림자들과 / 적개심으로 무장한 유령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중략) 시대는 점점 사나워져갑니다 / 사람들이 저마다 내면의 사나운 짐승을 꺼내어 / 거리로 내몰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자신을 포함한 현실 정치권에다 하는 비판으로 읽힐 만한 대목이다.

이에 대해 그는 "모두가 양극단에서 확신에 넘쳐 있고, 다른 생각 가진 사람을 배척·혐오·조롱하는 사회가 됐다"면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정신적 내전 상태로 가게 되는데, 이를 돌아보게 하는 목소리는 작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혐오와 조롱의 언어에, 행동은 거칠고 경박한 사람들끼리 모여 기뻐하는 게 얼마나 황폐한 건지, 누군가는 '이건 아니다'라 말해야 해요.

영혼 없는 정치, 영성 없는 진보는 길 없는 길로 질주하게 만듭니다.

"
시인은 현실정치를 떠나는 소회를 선문답풍의 '심고'(心告)라는 시에서 이렇게 적기도 했다.

"시 쓰다 말고 정치는 왜 했노? / 세상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 그래, 세상은 좀 바꾸었나? / 마당만 좀 쓸다 온 것 같습니다 / 깨끗해졌다 싶으면 / 흙바람 쓰레기 다시 몰려오곤 했습니다"
'심고'란 민족종교 동학(東學)의 용어로, 내면의 한울님과 나누는 마음 속 대화를 뜻한다.

시인은 국회를 나오는 심정을 묻자 "오랜만에 집권해 좋은 정치를 펼칠 기회가 왔는데 분열해서 (기회를) 날렸다.

더 많이 설득하고 대화해 화합·통합을 이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나오게 됐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그러면서 "정치적 역할이 다시 앞으로 주어질지는 알 수 없고, 이제는 문학으로 역할을 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심고'의 화자는 '마당만 좀 쓸다 온 것 같다'고 했지만, 현실의 시인은 후배 문화예술인들이 국회에 진출해 예술가들을 대변하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는 당부도 했다.

"21만명의 예술가를 대신해 일할 사람이 국회에 꼭 필요합니다.

(현 정부가) 문화예술 예산을 대책없이 삭감했는데 국회가 새로 시작되면 이를 복원하는 일을 (후배 의원들이) 곧바로 해야 해요.

"
올해로 등단 40년을 맞은 시인은 당분간 고향 청주와 서울을 오가면서 글을 쓸 계획이다.

준비 중인 산문집에서는 정치권에 몸담았던 지난날에 대한 소회를 담을 예정이다.

시인은 간담회 끝엔 국회에 처음 등원하던 날 받은 '근조' 화분 얘기를 들려줬다.

"밖에서 볼 때는 제가 국회에 들어갔으니 '너는 이제 시인으로서는 죽었다'라고 보신 거죠. 그 후로 화분에 메일 물을 주고 가꾸며 '나는 끝났는가'를 늘 생각했습니다.

난은 아직도 아주 잘 자라고 있어요. (웃음)"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