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아파트라 주차장 부족한데 웬 비행기가…" 갈등 폭발 [오세성의 헌집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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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성의 헌집만세(8)노후 아파트 주민들은 항상 부족한 주차 공간으로 불편을 겪습니다. 최근에는 다양해진 취미 탓에 주차장으로 캠핑카, 보트, 캠핑 트레일러 등이 들어오면서 주차 공간을 둘러싼 주민들의 갈등이 한층 깊어지고 있습니다.
주차장 한 켠 차지하는 장기 주차 트레일러
주민들 "주차 공간 부족해 민폐" 지적에
차주는 "등록해 사용료 내니 정당" 반발
해결책 못 찾은 갈등…온라인으로 논쟁 확산
수도권의 A 아파트 단지는 최근 무동력 트레일러 등 레저용 차량의 단지 내 주차를 금지하는 규약 개정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주차 공간이 부족해 테니스장이나 아이들 놀이터까지 주차장으로 바꿨는데, 어느 순간부터 주차장 한구석을 캠핑 트레일러들이 차지했기 때문입니다.트레일러 차주들도 할 말은 있습니다. 트레일러도 번호판을 발급받은 차량이며, 등록하고 비용을 낸다면 자유롭게 주차장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고질적인 주차 공간 부족 문제를 트레일러 차주들에게 떠넘길 뿐이라는 불만도 있습니다.코로나19 시기 캠핑 트레일러를 마련했다는 한 차주는 "승용차 1대와 트레일러 1대를 등록했다. 차 2대를 등록한 것과 다를 것이 없다"며 "차를 3대 이상 등록한 가구도 있을 텐데, 그런 가구보다 차 2대를 주차한 게 더 나쁘다는 인식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주차장 부족한 노후 아파트…트레일러 등 레저용 차 '갈등'
그러면서 "트레일러도 공용부지를 사용할 권리가 있다"며 "주차 공간이 협소하다는 이유로 트레일러가 쫓겨나면 다음 차례는 트럭, 승합차, 오토바이가 될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하지만 캠핑 트레일러가 주차장 한 칸을 채우면 해당 주차면은 장기간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나가고 들어오기를 반복하는 자동차와 달리 평상시 쓰지 않는 트레일러는 자연스레 한 자리에 고정 주차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차장의 회전율을 낮춰 주차난을 가중하는 요인이 됩니다.1980년대만 하더라도 자동차는 사치품이었고, 아파트 단지의 주차장도 매우 협소했습니다. 당시 주택건설기준에 관한 규칙에서는 수도권을 기준으로 전용 60㎡ 미만은 가구당 0.2대, 전용 85㎡ 미만은 가구당 0.4대의 주차장을 마련하도록 했습니다. 가령 가구당 주차면이 0.4대인 노후 아파트에서 트레일러가 일부 주차 칸을 차지한다면 가뜩이나 심각한 주차난이 더 극심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그렇기에 법원에서는 트레일러의 공용부지 사용 권리보다 아파트 자체 관리규약을 우선하고 있습니다. 2018년 대구지방법원은 캠핑 트레일러 등 레저용 자동차 주차를 금지한 아파트 입주자대표회를 상대로 주차권 존재확인 청구 소송을 낸 이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결했습니다.주차 공간이 부족한 아파트 상황을 감안할 때 공간을 장기 점유해 민원을 유발하는 레저용 차의 이용을 제한하는 것은 허용할 수 있는 범위라는 것입니다.
지난해에도 픽업트럭 등 대형 차량의 주차장 이용을 제한한 부산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결정이 정당하다는 부산고등법원의 판결이 나왔습니다. 단지 내 주차 공간 부족을 이유로 입주자대표회가 주차장 등록 차량 크기를 제한하는 주차 규정을 개정했는데, 주차 공간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면 일부 제한은 불가피하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었습니다.
험난한 관리규약 개정…온라인으로 갈등 확산
하지만 관리 규약을 개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전체 입주자 과반수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B단지 입주자대표회 관계자는 "동별로 투표를 진행하고 있지만, 응답률이 매우 저조하다"며 "동별로 암묵적인 주차 구역이 나뉘다 보니 트레일러를 마주칠 일이 없는 동 주민들은 투표에 관심을 갖지 않는 모습"이라고 설명했습니다.이어 "다른 곳에서는 미등록 트레일러가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도 많다"며 "사유지에 침범한 미등록 트레일러는 대응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관리규약을 개정해 트레일러 진입 자체를 막아야 한다"고 토로했습니다.절반 넘는 입주민이 동조하지 않는다면 트레일러의 주차장 진입과 이용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주차장을 차지한 트레일러의 사진을 올린 게시물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제트스키와 보트, 심지어 비행기를 얹은 트레일러도 등장하곤 합니다.이런 글에서는 부족한 주차 공간에서 트레일러로 인해 주차가 어렵다는 하소연과 트레일러 등의 레저 차량은 민폐라는 지적이 달리곤 합니다. 이에 비용을 냈다면 문제로 삼을 수 없다는 댓글도 맞섭니다. 해결책을 찾지 못한 주민들의 갈등이 온라인으로 번져나간 셈입니다.갈등의 원인은 부족한 주차 공간에 있다고 하지만, 재건축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주차장을 더 짓기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트레일러 주차를 금지하는 단지도 있지만, 일부 단지에서는 트레일러 등 사용 빈도가 낮은 레저용 차에 일반 차량보다 더 비싼 주차료를 부과하는 식으로 합의점을 찾기도 합니다. 주차 공간 갈등을 원만히 풀기 위한 주민들의 노력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ses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