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 대신 경험 살리고 더 잘할 방법을 찾았다” [고두현의 인생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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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드물다.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를 할 때마다 그 경험에서 배우고, 다음번에는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을 뿐이다.” -할랜드 데이비드 샌더스
KFC 매장 입구에서 흰 양복에 지팡이를 걸치고 서 있는 노신사, ‘커넬 샌더스’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사람. 1890년 미국 인디애나에서 태어난 그는 여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일하러 나가자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했다. 음식 만드는 법을 혼자 배웠고, 열 살 때부터 농장에서 막노동을 했다. 열두 살 때 초등학교를 중퇴해야 했다. 열여섯 살 때는 생계를 위해 나이를 속여가며 미 육군에 입대했지만 병을 앓는 바람에 넉 달 만에 전역했다. 이후 증기선 선원부터 철도 노동자, 보험 외판원, 주유소 일까지 닥치는 대로 했다.
가난했지만 결혼도 하고 아이도 얻었다. 그러나 대공황의 격랑에 휩쓸려 마흔 살에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믿을 건 어릴 때 배운 요리 솜씨뿐이었다. 그는 주유소 한 귀퉁이에서 배고픈 여행자들에게 음식을 팔기 시작했다. 테이블 하나에 의자 여섯 개로 시작한 레스토랑은 입소문을 타고 날로 번창했다. 그는 여기서 번 돈으로 큰 모텔을 지었다. 그러나 불이 나 레스토랑과 모텔이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그 자리에 레스토랑을 다시 지었지만, 고속도로가 관통하면서 손님이 뚝 끊겼다. 이제 남은 것은 빚더미뿐. 게다가 아들을 잃고 아내에게도 버림받았다. 나이 60에 모든 것을 잃고 극한 상황에 빠진 그는 정신병원 신세까지 졌다. 어느덧 인생의 황혼기. 사회보장기금 105달러를 들고 그는 마지막 희망을 찾아 나섰다. 낡은 트럭에 요리 기구를 싣고 전국을 떠돌며 자신이 개발한 닭고기 조리법을 팔러 다녔다. 굶주림에 시달릴 때는 요리 샘플을 뜯어 먹으면서 끼니를 때웠다. 무려 1,008번이나 퇴짜를 맞으며 문전박대를 당하며 그는 실패를 거듭했다.
마침내 1,009번째 시도에서 그는 옛 친구의 레스토랑에 치킨 한 조각당 4센트를 받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다. (그가 퇴짜 맞은 횟수가 600~800회라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1,000번에 이르는, 최소 수백 번 이상의 실패를 거듭하며 창업에 성공한 특별한 사례인 것은 틀림없다.)
그가 본격적으로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65세 때였다. 레스토랑은 대성공을 이뤘다. 지점이 2년 사이 600여 개로 불어났고, 이후 150여 개국에 2만 개 이상으로 늘어났다. 이렇게 남다른 끈기와 집념으로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희망이 됐다. 노새를 타고 애팔래치아 산맥의 산골 마을들을 찾아다니며 식자재를 나눠주는 등 빈곤층을 위한 봉사 활동을 했다. 회사 수익금을 교회와 병원, 보이스카우트, 구세군 등에 보내며 외국 고아를 70여 명이나 입양해 보살피기도 했다.
이렇게 극적인 인생을 산 그는 1980년 급성 백혈병으로 90세에 세상을 떠났다. 장수 비결은 육군 복무 시절 몸에 익힌 규칙적인 생활이라고 한다. 그의 뜻을 이어받은 KFC 기금은 지금도 세계식량기구를 통해 굶주리는 사람들을 돕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고두현 시인 kdh@hankyung.com
KFC 매장 입구에서 흰 양복에 지팡이를 걸치고 서 있는 노신사, ‘커넬 샌더스’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사람. 1890년 미국 인디애나에서 태어난 그는 여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일하러 나가자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했다. 음식 만드는 법을 혼자 배웠고, 열 살 때부터 농장에서 막노동을 했다. 열두 살 때 초등학교를 중퇴해야 했다. 열여섯 살 때는 생계를 위해 나이를 속여가며 미 육군에 입대했지만 병을 앓는 바람에 넉 달 만에 전역했다. 이후 증기선 선원부터 철도 노동자, 보험 외판원, 주유소 일까지 닥치는 대로 했다.
가난했지만 결혼도 하고 아이도 얻었다. 그러나 대공황의 격랑에 휩쓸려 마흔 살에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믿을 건 어릴 때 배운 요리 솜씨뿐이었다. 그는 주유소 한 귀퉁이에서 배고픈 여행자들에게 음식을 팔기 시작했다. 테이블 하나에 의자 여섯 개로 시작한 레스토랑은 입소문을 타고 날로 번창했다. 그는 여기서 번 돈으로 큰 모텔을 지었다. 그러나 불이 나 레스토랑과 모텔이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그 자리에 레스토랑을 다시 지었지만, 고속도로가 관통하면서 손님이 뚝 끊겼다. 이제 남은 것은 빚더미뿐. 게다가 아들을 잃고 아내에게도 버림받았다. 나이 60에 모든 것을 잃고 극한 상황에 빠진 그는 정신병원 신세까지 졌다. 어느덧 인생의 황혼기. 사회보장기금 105달러를 들고 그는 마지막 희망을 찾아 나섰다. 낡은 트럭에 요리 기구를 싣고 전국을 떠돌며 자신이 개발한 닭고기 조리법을 팔러 다녔다. 굶주림에 시달릴 때는 요리 샘플을 뜯어 먹으면서 끼니를 때웠다. 무려 1,008번이나 퇴짜를 맞으며 문전박대를 당하며 그는 실패를 거듭했다.
마침내 1,009번째 시도에서 그는 옛 친구의 레스토랑에 치킨 한 조각당 4센트를 받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다. (그가 퇴짜 맞은 횟수가 600~800회라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1,000번에 이르는, 최소 수백 번 이상의 실패를 거듭하며 창업에 성공한 특별한 사례인 것은 틀림없다.)
그가 본격적으로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65세 때였다. 레스토랑은 대성공을 이뤘다. 지점이 2년 사이 600여 개로 불어났고, 이후 150여 개국에 2만 개 이상으로 늘어났다. 이렇게 남다른 끈기와 집념으로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희망이 됐다. 노새를 타고 애팔래치아 산맥의 산골 마을들을 찾아다니며 식자재를 나눠주는 등 빈곤층을 위한 봉사 활동을 했다. 회사 수익금을 교회와 병원, 보이스카우트, 구세군 등에 보내며 외국 고아를 70여 명이나 입양해 보살피기도 했다.
이렇게 극적인 인생을 산 그는 1980년 급성 백혈병으로 90세에 세상을 떠났다. 장수 비결은 육군 복무 시절 몸에 익힌 규칙적인 생활이라고 한다. 그의 뜻을 이어받은 KFC 기금은 지금도 세계식량기구를 통해 굶주리는 사람들을 돕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고두현 시인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