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예술' 사진의 재발견…인간의 '욕망'을 촬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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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한계 넘어선 대작들사진과 어둠은 출발부터 하나였다. 현대 사진술이 태동한 건 17세기 무렵. 캄캄한 상자에 빛을 투과하고, 벽면에 비친 이미지를 따라 그리던 화가들의 방식에서 기원했다. 이런 검은 상자에는 '카메라 옵스큐라'란 이름이 붙었다. 라틴어로 '어두운 방'이란 뜻이다. 오늘날 카메라의 어원이다.
뮤지엄 한미 '밤 끝으로의 여행'
리안갤러리 서울 '무한함의 끝'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림을 위한 보조 수단일 뿐이었다. 사진이 독자적인 예술로 인정받게 된 것도 비교적 최근 얘기다. 사진의 단짝인 어둠도 마찬가지로 찬밥 신세였다. 욕망과 공포, 무질서, 악 등 부정적인 개념과 연결 지어지며 서구 철학사에서 폄하되곤 했다.사진과 어둠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전시들이 서울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뮤지엄한미 '밤 끝으로의 여행', 리안갤러리 '무한함의 끝'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 사진전은 인간의 어둡고 은밀한 내면을 촬영한 대작들을 공개했다. 그동안 주류 예술의 그림자에 가려졌던 사진의 방대한 가능성, 그 '끝'을 살펴본다는 취지에서다.
낮 동안 억눌린 '어두운 욕망'을 촬영하다
'밤 끝으로의 여행'은 사방의 빛이 차단된 암실에서 출발한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둠 속, 작은 불빛에도 신경이 곤두선다. 야행성 동물처럼 한껏 예민해진 시야에 '애니멀로그램' 연작이 들어온다. 영국 사진작가 자나 브리스키(1966~)가 사마귀와 나방, 여우 등 야간 숲속의 포유류와 곤충을 기록한 작품이다.브리스키의 사진은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는다. 미리 준비해둔 대형 인화지 근처로 동물과 곤충이 다가온 순간 플래시를 터뜨려 그 그림자를 기록한다. 일명 '포토그램' 기법으로 완성된 그의 작품은 디지털 기술을 최대한 배제한다. 원시 상태의 사진술에 가깝다. 작가가 자연의 생명과 조우했을 때 느꼈을 경이롭고도 신비한 감정이 오롯이 전해지는 이유다.서울 삼청동 뮤지엄한미의 전시는 이처럼 '밤'을 주제로 국내외 사진 거장 32명의 작품 100여점을 살펴본다. 1900년대 초반 고전부터 컨템포러리까지 지난 20년간 뮤지엄한미가 수집해온 작품들이다. 구본창(1953~), 김재수(1929~2006), 만 레이(1890~1976), 브라사이(1899~1984) 등 하나같이 유명 작가들이다.이들이 포착한 밤은 현대 도시인의 고독을 끄집어낸다. 앤설 애덤스의 '뉴멕시코 헤르난데스의 월출'이 광활하게 펼쳐낸 도시 풍경 주위로 모리야마 다이도의 '들개'가 배회한다. 에드워드 스타이컨의 '플랫아이언 빌딩'에선 인간 문명의 불이 꺼지면, 브리스키의 밤 곤충들의 시간이 열린다.'욕망'은 이번 전시를 관통하는 주제다. 낮 동안 억눌려 있던 욕구가 어둠과 함께 격동적으로 분출하는 듯하다. 꽃잎, 달걀이 든 유리그릇, 깃털, 조개 등 여성과 남성의 신체를 연상하는 피사체들이 에로틱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여성의 신체가 남성의 손안에 속박된 듯 묘사한 제리 율스만의 '포토몽타주'도 놓쳐선 안 될 작품이다.브라사이의 '트랜스뮤테이션' 연작은 보다 직관적이다. 사진 위에 여성의 육체를 덧대 그리며 작가의 성적 욕망을 투사했다. 기괴하게 뒤틀린 육체와 제멋대로 콜라주 된 이미지는 더 이상 현실의 무언가가 아니다. '사물의 재현'이란 사진의 원래 기능을 아득히 넘어선 그의 작품엔 '무의식을 촬영한다'는 평가가 따라붙는다.
해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법. 김태동 작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적막한 새벽의 어스름에 마주친 인간 군상을 촬영한 '데이 브레이크(Day Break)' 연작을 통해서다. 수직으로 하강하는 듯한 가로등, 바닥에 동심원을 형성하는 표지선 등 사진의 속 구성요소는 각각 의미심장한 상징을 내포한다.죽음 역시 어둠과 불가분의 관계다. 싸늘한 긴장감과 공허함 등 불편한 심상을 반복적으로 투사한 사진들이 전시 마지막을 장식한다. 마리오 자코멜리의 '12월 31일'과 '시를 위하여, 자화상'은 노년의 작가가 꿈에서 만난 장면을 재현한 사진들이다. 작가 본인의 모습이나 흰 비둘기, 들개 등 죽음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8월 25일까지.
주류 예술 향한 사진의 '반란'
서울 창성동 리안갤러리에서 열린 '무한함의 끝'은 사진이 독자적인 예술 장르로 거듭나는데 기여한 상징적인 작가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국내 작가 고명근, 권부근부터 신디 셔먼, 칸디다 회퍼 등 국내외 유명 작가들의 사진 작업 21점을 전시하면서다. 사진에 회화적인 성격을 가미한 예술사진부터 연출사진, 개념사진 등 다양한 예술적 실험 속에서 이들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기괴하게 분장한 광대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미국 현대 사진계의 가장 입지적인 인물 신디 셔먼의 '광대'(2003~2004) 시리즈다. 촌스러운 의상과 초점을 잃은 눈동자, 여성 같으면서도 목젖이 돌출된 듯한 연출은 화면 속 인물의 정체를 가늠할 수 없게 만든다.광대의 정체는 신디 셔먼 본인이다. 광대의 이미지 뒤에 숨겨진 우울함과 여성을 둘러싼 고정관념을 결합했다. 이처럼 셔먼은 자신이 모델로 등장한 그로테스크한 여성 이미지를 선보여왔다. 대중매체에서 소비하는 여성 이미지를 차용해 가부장적 남성 사회를 은연중에 비판하려는 의도에서다.
미학적 아름다움과 사회 참여적 메시지, 예술사적 가치를 두루 갖췄다는 점에서 셔먼의 작품은 매년 사진 경매 최고 가격대에 낙찰된다. 침대에 누운 작가 본인을 촬영한 '무제'(1981)가 대표적이다. 지난 2021년 추정가인 200만~300만달러를 훌쩍 넘어선 315만달러(약 43억원)에 새 주인을 만났다.다른 작품들의 존재감도 셔먼에 밀리지 않는다. 작가 본인이 3년에 걸쳐 9차례 성형수술을 한 과정을 기록한 프랑스 작가 오를란, 인터넷에 나도는 포르노그래피 누드 사진을 연출한 토마스 루프 등의 작품이 특히 충격적이다. 자극적인 작품만 있는 건 아니다. 1965년부터 2011년 작고하기까지 자신의 초상을 반복 촬영한 로만 오팔카의 '인생 프로그램'은 잔잔한 여운을 준다.
전시장 지하 1층에 걸린 '최후의 반란'(2005~2006)도 눈여겨볼 만하다. 러시아 작가그룹 AES+F이 연출한 대표작이다. 전쟁과 살인, 화산폭발 등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현장을 영국 로열발레단 소속 청년 모델들이 재현했다. 자극적인 주제와 대조되는 정갈한 화면이 이질감을 자아낸다.'최후의 반란'은 이번에 전시된 20여점의 사진 가운데 유일하게 캔버스에 인화한 작품이다. 화면 구도는 낭만주의 시대 정통 서양화를 연상케 한다. 일본도와 야구방망이, 총을 들고 나선 청년들의 이미지에선 초현실적인 분위기마저 감돈다. 작품이 '반란'을 벌이는 상대는 사진을 그림의 '보조'로 단정하는 예술계의 편견일지도. 전시는 6월 29일까지다.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