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은 몸이 무거워 울고 싶을 때” 읽고 싶은 詩

[arte] 김성태의 탐나는 책

이해인 지음 (1976, 가톨릭출판사)
“시가 민들레처럼 나타나 모든 이를 형제자매로 만들어주지.”

언젠가 당신이 한 말씀이 떠올라 회사 화단에 핀 민들레를 매일 들여다보았다. 노란 잎이 투명해지며 하늘로 날아가던 날 “그래, 민들레 홀씨처럼 가벼워져야겠다. 기도조차 하늘에 닿으려면 가벼워져야겠다. 좋은 마음을 붙들지 않고 나누며 퍼트려야겠다”라고 내 서랍 속 낡은 수첩에 적었다.
언젠가 당신이 수녀원을 거닐며 말씀했다. “라일락 잎사귀를 씹어봐. 쓰디쓴 사랑의 맛이지.” 나는 초록 잎사귀 한 장을 떼어 씹곤 “정말로 씹는 사랑은 쓰다”라고 휴대전화 메모장에 적었다.

“늘 등꽃처럼 겸손해야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 애쓰지 않아도 돼.” “힘든 삶이었지만 명랑하게 살았지.” “꽃 사이를 걸으면 꽃이 되지.” “언제나 동그란 마음으로 살아야지.” 당신의 말씀이 나를 시의 자리로 이끌고 갈 때마다 나는 부끄러웠다.

당신을 뵌 날에는 시란 무엇일까 생각한다. 아직 내가 고작 쓸 수 있는 시란 내가 쓰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받아적는 것이다. 내가 쥔 펜 속에 늘 흰 잉크가 있는 건 경험이 빈약하거나 결핍이 충분치 않거나 연마가 부족한 탓이다. 실은 나는 등잔불 꺼진 어둠을 견딜 배짱도 없고, 용광로 같은 분노도 없고, 빙하 같은 고요도 없고, 붉은 토마토처럼 깨질 용기도 없고, 어떤 각성도 없다. 당신은 그런 내게 말씀했다. “성태도 시집을 내야지.”
이해인 수녀 ⓒ구은서 기자
올해는 이해인 수녀님이 수녀원에 입회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다. 지금 나는 수녀님이 오랜 기간 글방에서 쓴 시와 일기, 서랍 속에 모아둔 엽서와 편지, 눈빛을 나눈 사람과 사물에 관한 이야기를 모아 책을 만들고 있다. 시를 쓰는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들여다본 책이 곧 인쇄를 앞두고 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글 한 편, 한 편을 읽으며 사라지고 남은 문장과 사라진 문장과 사라질 문장을 나는 떠올린다. 돌이 의도해 응축되지 않은 것처럼, 꽃이 계획해 잎을 꺼내지 않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단단하고 향기로운 수녀님의 글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

수녀님의 단상집을 만들기로 한 날부터 수녀님이 쓴 시집과 산문집을 틈틈이 낱낱이 읽었다. 그중 연필처럼 내 곁에 둔 시집이 <민들레의 영토>다. 이 시집은 수녀님의 첫 시집으로, 1976년 출간된 이래 반세기가 가까운 지금까지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기도는 나의 음악/ 가슴 한복판에 꽂아 놓은/ 사랑은 단 하나의/ 성스러운 깃발”이란 시구로 시작하는 국민 애송시 '민들레의 영토'를 나도 좋아하지만, 내가 이번 신간을 편집하면서 자주 읽은 시는 '별을 보면'이다.
《민들레의 영토》 초판 표지 / 필자 제공
《민들레의 영토》 초판 속표지
이 시는 수녀님이 예비 수녀 시절인 1966년에 쓴 시로, “하늘은/ 별들의 꽃밭// 별을 보면/ 내 마음은/ 뜨겁게 가난해지네”로 시작한다. 내가 특히 자주 읊는 시구는 “내 작은 몸이/ 무거워/ 울고 싶을 때// 그 넓은 꽃밭에 앉아/ 영혼의 호흡 소리/ 음악을 듣네”인데, 내가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꽃밭으로 데려가 어둔 마음에 밝은 빛을 들여놓기 때문이다.

“오늘은 어제보다/ 죽음이/ 한 치 더 가까워도// 평화로이/ 별을 보며/ 웃어 주는 마음// 훗날/ 별만이 아는 나의 이야기/ 꽃으로 피게// 살아서 오늘을 더 높이/ 내불던 피리/ 찾아야겠네”란 구절을 읽을 때는 한 방송에서 눈물 빛을 내비친 수녀님의 모습이 떠오른다.수녀님은 첫 시집 끝에 이렇게 부기했다. “‘너’ 없이 태어날 수 없던 ‘나’의 시는 또한 ‘우리’의 것이 될 수도 있겠기 때문입니다.” 수녀님은 ‘남에게 나에게 해주길 기대하는 것을 남에게 내가 먼저 해주는 기쁨’을 자주 말씀한다. 바닷가에서 주운 조가비나 돌멩이에 ‘기쁨’ ‘침묵’ ‘인내’ ‘기도’란 단어를 적어 글방에 온 손님들에게 선물한다. 마른 나뭇잎들, 꽃잎들로 독자에게 보낼 카드를 만든다. 떨어진 솔방울을 사람들 손에 건네며 솔 향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 수녀님이 쓴 시는 그 시를 쓴 마음이 고와서 달빛 별빛 햇빛처럼 다가온다.

어떤 시집은 그 시집 앞에서 두 손을 모으게 한다. 어떤 시구는 시인의 모습을 떠오르게 해 우리를 울고 웃게 한다. 이해인 수녀님의 시집과 이해인 수녀님이 내겐 그러하다. 몇 번의 계절을 담은 사진 촬영 마지막 날, 수녀님이 흰옷을 입고 천사처럼 이렇게 말씀했다. “날마다 크리스마스처럼 살기로 했지.” 백 번 치는 종소리보다 한 번 치는 종소리가 마음속에 깊이 울려 퍼지는 순간이 있듯, 당신의 그 한 말씀이 내 가슴속에 종소리처럼 남아 나를 종종 울린다.

김성태 김영사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