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고스티나와 이별한 고흐가 분리불안을 떨쳐내고 그린 그림은?

[arte] 김동훈의 고흐로 읽는 심리수업
파리에 이주한 이듬해, 고흐는 이탈리아 여인 아고스티나 세가토리(Agostina Segatori)를 사랑했다. 그녀는 열아홉 살이던 1860년에 에두아르 마네의 작품에서 포즈를 취하여 명성을 얻고는 이후 30년 동안 모델로 활약했다. 고흐에게도 세 편의 초상화를 남겼다. 당시 고흐가 그린 「누워 있는 여인의 누드」 세 편의 모델로도 추정된다.

고흐는 야외에서 풍경화를 그리는 것을 좋아했지만, 파리의 첫해 겨울 몹시 추운 날씨로 외출이 어려웠다. 작업할 곳을 찾는 자신에게 따뜻한 차와 음식을 제공하는 여인을 만났다. 카페 탕부랭(탬버린)의 음료는 유난히 따뜻했다. 고흐는 이곳에서 초상화와 정물화를 열심히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겨울의 따스함처럼 시작된 고흐의 사랑은 여름까지 계속됐다.

예술가들의 뮤즈

아고스티나는 이국적인 외모로 ‘이탈리아 여인’이라는 이름의 그림에 으레 주인공이었다. 유명 화가들의 모델로 크게 주목받았다. 에두아르 마네 외에도 요제프 당탕, 장 밥티스트 코로, 장 레옹 제롬, 외젠 들라크루아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특히 이들 중에 당탕과는 12년 동안 연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둘 사이에 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1884년 그와 헤어진 후 모델로 벌었던 돈으로 카페를 운영했다.
장 밥티스트 코로 「아고스티나」(1866)
아고스티나는 유명인들의 명성으로 돈을 벌려고 했다. 유명인들이 카페에 드나들고 있다는 것을 사업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다. 그 목적을 갖고 이탈리아를 테마로 카페를 꾸몄을 뿐만 아니라 독특하게 테이블, 쟁반 등을 탬버린 모양으로 제작하고 카페 '탕부랭'이라 이름 붙였다. 어떻게든 특별한 인상을 주려고 노력했다. 또한 명사들의 작품으로 벽을 장식해 더욱 흥미진진한 명소로 만들었다. 모델 일을 할 때 알고 지냈던 화가들을 활용해 폴 고갱, 노르베르트 괴네우트, 에밀 베르나르, 루이 앙케틴, 앙리 드 툴루즈-로트렉 등 인기 있는 명사들이 카페를 자주 찾게 만들었다.

더욱이 아고스티나는 젊은 예술가와 작가가 가진 꿈을 잘 활용했다. 그들을 향해 신진 예술가들을 발굴한다는 명목으로 작품을 담보로 술과 음식을 제공했다. 급기야 카페를 젊은 예술가들의 사교장으로 만들었다. 아고스티나는 재능 있는 예술가들과의 친분을 통해 자신을 파리에 알리고 싶었다. 바로 이 무렵 고흐가 아고스티나를 알게 되었다. 고흐와 절친이었던 에밀 베르나르에 따르면, 고흐는 이 여인과 계약을 맺고 자신의 정물화를 매주 몇 점씩 맡기고 식사를 했다고 한다.

전직 모델 마담의 초상

과거 아고스티나는 화가들의 용돈에 의존해 그들 앞에서 몇 시간이고 꼼짝 말고 있어야 했다. 이제는 그들을 부리며 수익을 얻는 여사장이 되었다. 그렇다면 전직 모델과 마담 사이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그녀를 모델로 그린 코로의 두 편의 그림과 마담으로 그린 고흐의 세 편의 그림을 비교해 보자.
[왼쪽] 장 밥티스트 코로 「아고스티나」 (1866) [오른쪽] 장 밥티스트 코로 「중단된 독서」 (1870)
모델로서의 모습과 마담으로서의 모습에는 나이에 따른 세월의 흔적이 나타난다. 코로의 두 작품 「아고스티나」와 「중단된 독서」에서 이 여인은 각각 25세, 29세였다. 고흐의 세 작품에서는 모두 46세였다. 하지만 나이만 탓하기엔 부족한 분명한 차이가 있다. 코로의 그림에서 아고스티나는 항상 진주목걸이와 머리띠를 착용하였으며 뽀얀 피부가 돋보인다. 그녀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책을 가까이하는 지적인 인상을 풍겼다.
[왼쪽] 반 고흐 「아고스티나 세가토리 초상」(1887) [오른쪽] 반 고흐 「이탈리아 여인」(1887)
반면에 고흐가 그린 초상화에서 그녀의 지적인 모습은 사라졌다. 후일담에 따르면, 그녀는 「아고스티나 세가토리 초상」과 「이탈리아 여인」을 보고 실망하여 고흐에게 “당신이 좋아할 만한 프랑스 소녀”처럼 그려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다시 그린 그림이 「탕부랭 카페에서: 아고스티나 세가토리」였다. 이 그림을 보고 그녀는 비로소 흡족했다. 최근 일각에서는 이 그림에 엑스레이 촬영을 한 결과 그 아래 숨겨진 여인의 반신상이 드러나는 대발견이 있었다. 바로 이 반신상에 대해 아고스티나가 불평을 해서 고흐가 새로 그린 것이 「탕부랭 카페에서」라는 해석도 있다.
[위] 반 고흐 「탕부랭 카페에서: 아고스티나 세가토리」(1887) [아래] 엑스선으로 촬영한 결과 나타난 밑그림
이 초상화는 고흐가 먼저 그린 두 개의 초상화 또는 그 아래 숨겨진 모습과 상당히 다르다. 우선 독특한 아이템들이 가득 있다. 탬버린 모양의 식탁들, 맥주, 담배, 일본 판화, 빈 의자 등. 붉은색, 노란색, 녹색, 파란색, 흰색 등의 다채로운 색이 사용되면서 중심에 배치된 아고스티나로 집중된다. 그림 속 여인은 자신의 패션 감각을 드러내듯 얼핏 보면 군복 같은 상의와 화려한 치마를 입었다. 그리고 우뚝 솟은 붉은 깃털 모자를 쓰고 있다. 그녀의 왼쪽에는 맥주잔이, 오른쪽에는 불붙은 담배가 왼손에 들려 있다. 대중은 여인이 공공장소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행위를 못마땅하게 여겨 이 그림을 몹시 비난했다.

가장 특이한 것은 그녀의 눈이다. 고흐는 초상화에서 강렬한 색상과 대담한 선으로 눈을 묘사한다. 자신의 자화상에서도 눈의 색깔을 일관되지 않게 사용하여 인물의 감정을 표현했다. 이 그림에서 여인의 눈을 독특하게 표현한 것은 이 여인에 대한 내면세계를 드러내려는 의도로 읽힌다. 양쪽 눈의 초점이 제각각이고 크기와 모양이 달라 얼굴의 균형이 맞지 않는다. 한쪽 눈썹은 이상하게 뾰족하다. 그 날카로운 눈썹 아래 심하게 주름진 피부 속으로 큰 눈구멍과 우뚝 솟은 닭 볏 같은 모자가 괴이하다. 거기에 귀는 구멍마저 없는 듯 매끈하여 뚫릴 것 같은 눈과 빳빳하게 솟은 머리에 시선을 모이게 한다. 무의식적으로 이 여인에게서 느꼈던 고흐의 욕망, 또는 고흐에게 품었던 여인의 욕망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격렬한 사랑과 분리불안

둘 사이의 갈등은 고흐의 그림에 대한 아고스티나의 일방적 처분 때문이었다. 고흐가 테오에게 쓴 편지에 따르면, 아고스티나는 사업에 실패하면서 카페를 비롯한 모든 재산이 압류를 당했다. 고흐는 그림들의 처분과 관련해 의논하기를 요구했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보내 일을 처리했다. 그동안 담보로 맡겼던 고흐의 그림들이 한순간에 헐값에 팔려나간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흐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와 미래를 함께하고 싶었지만 둘 사이에 생긴 소중한 생명마저도 아고스티나는 흔적을 지워버렸다. 이 사건을 겪은 후 고흐는 테오에게 그녀를 사랑했고 자신들을 닮은 아이와 행복하게 살고 싶었지만 지금은 낙태나 유산으로 사라진 상태라 고백했다.

결혼해서 아이를 갖는 꿈을 서서히 잃어 가고 있어. 꿈을 키울 서른다섯에 이런 생각을 하니 꽤 서글퍼. 그리고 가끔은 이 빌어먹을 그림을 탓하기도 해.
―고흐의 편지에서(1887년 7월 23일)

고흐는 늘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 마음에 안정을 얻었다. 그래서 연인 관계를 정리하고 난 후에는 불안장애가 너무 심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분리불안장애라고 한다. 즉 분리불안이란 영유아가 부모나 보호자로부터 떨어져 있을 때 느끼는 정서적 두려움이다. 어른이 된 후에도 매우 친밀한 사람과 분리될 때 일상생활을 하는 데 지장을 줄 정도라면 분리불안장애를 의심할 수 있다. 또한 부모와 떨어지기가 힘들어 가까이 지내거나 자주 방문하는 경우라든가, 혼자 있는 것이 두려워 맞지 않는 상대와 비극적 관계를 이어 간다면 분리불안장애다.

고흐 역시 자신이 의지하던 부모나 연인, 친구, 형제들과 헤어지고 난 후 이런 불안장애가 심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 그의 나이 서른 중반을 향하면서, 특히 아고스티나와 결별하고 나서는 이 불안을 극복했다. 아마도 이즈음 고흐는 객관적으로 현재의 상황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긴 듯하다. 아고스티나가 더 이상 자신과 진지한 관계를 원하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되자 꿈꿔왔던 그녀와의 행복한 가정을 포기하고 말았다.

아고스티나는 사실 그 누구와도 진지한 관계를 지속할 수 없었던 사림이다. 출세에 목마른 자들만 그녀에게 잠시 기웃거릴 뿐 그녀에게서 그 어떤 매력도 느낄 수 없었다. 심지어 그녀가 일자리를 잃고 궁지에 몰렸을 때 그 누구도 그녀를 돕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녀가 화가 쥘 셰레에게 의뢰한 카페의 포스터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된다. 포스터에는 고작 ‘세가토리의 집’, ‘탕부랭 카페’, ‘터무니없이 싼 술값’이란 문구가 전부다. ‘예술가들의 등용문’이라는 그녀의 포부에 비해 그것을 홍보하는 문구가 너무 실망스럽다. 그래서 그런지 에밀 베르나르는 이곳을 카페라는 말 대신 ‘선술집’이라고 불렀다.
카페 '탕부랭' 포스터
하지만 고흐는 인기에만 목말라하는 아고스티나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봤다. 사랑하는 여인이 성공에 대한 열망으로 고통당할 때 동정심을 느꼈다. 심지어 그녀를 한 번도 원망하거나 비방하지 않았으며 타인들에게는 “격렬히 사랑했지만 예술과 사랑이 같이 갈 수 없기에 헤어졌다.”고 말했다. 작가들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휘둘렀던 이 여인과 헤어진 뒤 고흐는 다른 차원의 그림들을 그릴 수 있었다. 이 시기에 분리불안이 사라진 것은 고흐에게 참 다행이다. 불안을 떨쳐버리고 고독에 당당히 맞서니 자신의 생각을 캔버스에 온전히 담아낼 수 있었다.

사랑은 서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지향하는 목표점이 중요하다. 그녀와 사귀면서 점차 그 사실을 알게 된 고흐는 생동감 넘치는 카페 분위기와 대조적으로 불안의 그림자를 품은 여인을 「탕부랭 카페에서」에 담았다. 그녀와의 이별을 받아들이고 각자의 길을 가야겠지만, 편지에 따르면 고흐는 그녀가 나아가는 길을 응원했다.
반 고흐 「네 송이 해바라기」(1887)
이별 후 고흐는 격렬하게 사랑했던 여인에게 「네 송이 해바라기」를 남겼다. 줄기에서 잘려 시들어 가는 해바라기 네 송이 중에 한 송이는 뒤를 보고 있다. 바라보는 방향이 다른 이 한 송이는 한때 잘나갔던 자신의 지난날을 열망하는 아고스티나를 닮았다. 또한 그림 속 해바라기처럼 고흐에게 있어서 사랑(꽃)이 꺾이고 아기(씨앗)가 싹트기도 전에 버려졌다. 이제 고흐는 같은 곳(해)을 바라보는 사람을 꿈꿀 때(바라기)마다 해바라기를 그리기로 다짐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참 편했다. 외롭지만 불안하지 않았다. 자신이 바라보는 것이 있으니 말이다.

김동훈 인문학연구소 ‘퓨라파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