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춘근, 사진으로 뉴욕 9·11과 제주 4·3의 그림자를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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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되살린 역사의 그림자과거의 역사를 사진으로 담아낼 수 있을까?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의 현장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사진가의 집요한 탐구와 독창적 발상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라운드 제로’는 비극의 순환
24일까지 서울 금보성아트센터에서
사진가 하춘근이 미국 뉴욕에서 발생한 9·11테러,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 한반도 비무장지대(DMZ), 제주 4·3 사건 등 어두운 역사적 사건들을 사진에 담아냈다. 서울 평창동 금보성아트센터에서 24일까지 열리는 사진전은 하춘근이 발간한 사진집 ‘역사의 그림자(도서출판 꽃피다·320쪽·12만원)’를 기념하는 행사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투명한 직육면체 2020개가 빌딩 형태를 이루고 있는 사진 설치 작품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가 감상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큐브 안에는 구겨진 종이가 들어있다. 작가가 미국 뉴욕 9·11 테러 현장을 촬영한 사진들을 투명한 플라스틱 상자 안에 넣은 것이다.
큐브로 이룬 커다란 조형물 바닥엔 원형과 사각형의 작품 두 개가 설치돼 있다. 원형은 일본 나가사키에서 촬영한 809장의 사진을 재조합한 것이다. 사각형은 미국 뉴욕 그라운드제로 희생자 2977명의 이름을 담은 사진들로 합성한 것이다. 또한 뉴욕 그라운드제로 주변의 풍경을 중복 촬영한 추상적 이미지 중간에 현재의 장면을 합성해 사건의 무게와 깊이를 형상화한 작품들이 이어진다. 하춘근 사진가는 “사진이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며 “그래서 9·11테러 현장인 미국 뉴욕 그라운드제로에서 촬영한 사진들을 구겨 넣은 플라스틱 정육면체로 무너진 월드트레이드센터를 재현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이러한 경험을 했다고 밝혔다. “‘그라운드 제로’는 2차대전 중 원자폭탄이 떨어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피폭 지점을 일컫는 군사용어이기도 했지요. 비극이 순환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드러낸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역사의 그림자’엔 비무장지대를 사진으로 표현한 ‘DMZ’ 연작이 펼쳐진다. 비무장지대 풍경을 반복적으로 합성해 몽환적인 장면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 뒤, 그 가운데 가로로 길게 현실의 명확한 장면을 합성해 놓은 이 작품들은 관람자들이 생각에 빠져들게 한다. 현실을 비현실적으로 표현해, 수많은 이해와 역사의 편린들이 얽혀있는 분단의 현장에 대한 작가의 철학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드러냈다. ‘제주 4·3’ 연작 가운데 현실의 제주 풍경에 후반 이미지 작업을 더한 작품들이 눈길을 끈다. 풍경 사진 위에 덧붙여져 가로로 흘러가는 듯한 형상들이라서다. 작가는 “과거 역사를 단 한 장으로 포착하는 것이 불가능해, 많은 사진들을 중복적으로 편집하고 이어붙여, 그 비극성과 그 사건이 갖는 복잡성을 드러내려 했다”며 “내 작품들은 사진을 바탕으로 설치와 회화의 경계를 오가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24일까지.
신경훈 목스페이스(런던) 코리아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