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훈 칼럼] 푸틴 등에 업은 김정은의 '남조선 완정론'
입력
수정
지면A30
김정은, 러시아에 무기 지원우크라이나 전쟁의 최대 수혜주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다. 얼마 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간 공동선언문에도 여실히 드러났다. “양측은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행하는 군사 분야에서의 위협 행위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대결을 촉발시키는 것에 반대한다”고 했다. 중국·러시아가 국제무대에서 북한을 감싸온 사례는 많지만 양국 정상이 동시에 두둔하고 나선 것은 대단히 이례적이다. 외교 분석가들은 푸틴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김정은은 푸틴에게 천군만마 같은 존재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무기와 노동력 등 실효적 도움을 줬기 때문이다. 중국은 미국 눈치를 보느라 드론 정도만 제공했고, 러시아의 전통적 우방인 벨라루스와 아르메니아도 군사적 지원은 하지 않았다.
대가로 군사적 경제적 이득
"남조선 전 영토 평정" 위협
北 핵전력 고도화·현대화 맞서
한국, 독자 대응능력 구축해야
러·북 상응 美 첨단기술 필요
조일훈 논설실장
푸틴이 최근 국방장관에 경제관료 출신을 기용한 것은 러시아 경제를 상시 전시체제로 이끌면서 전쟁 장기화에 대비하겠다는 포석으로 해석된다. 이 경우 재래식 탄약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북한과의 거래가 반드시 필요하다. 러시아는 개전 이후 총 1000만~2000만 발 정도의 포탄을 우크라이나에 퍼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연간 생산량의 수백 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화력이다. 젊은 군인들을 전장에 투입한 러시아로선 군수공장을 돌릴 노동력 추가 확보도 절실하다. 지난 3월 세르게이 나리시킨 러시아 대외정보국장이 평양에서 이창대 국가보위상을 만난 것은 그 일환이다. 인력 통제와 방첩 활동이 정보당국 수장들에게 맡겨진 것이다.김정은은 그야말로 숨통이 트였다. 구닥다리 재래식 무기를 팔아 번 돈으로 군 전력을 현대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외화벌이 확대로 경제난도 덜 수 있게 됐다. 이는 김정은 대외전략에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핵전력 고도화와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할 수 있고 미국 일본 등을 상대로 협상력도 높일 수 있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러시아의 첨단기술 이전이다. 북한은 완전한 핵보유국이 되기 위해 △핵 기폭장치 △핵추진 잠수함 △정찰 위성 기술 등을 원하고 있다. 지난해 9월 푸틴이 김정은을 평양에서 2300㎞ 떨어진 보스토치니 우주기지로 초청한 것도 이런 사정에 맞춘 것이다. 보스토치니는 최첨단 우주·위성·미사일 기술을 집결시킨 1급 보안시설로 김정은으로선 최고의 환대를 받은 셈이다.
러시아가 어느 정도의 성의를 보여줄지는 알 수 없지만, 북한의 전력 현대화나 군사기술 확충은 모두 새로운 위협이다. 김정은이 지난해 말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미국과 그 추종 세력들의 적대시 정책이 지속되고 있고…유사시 핵무력을 포함한 모든 물리적 수단을 동원해 남조선 전 영토를 평정하기 위한 대사변 준비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한 것은 향후 도발 수위가 과거와는 차원이 다를 것임을 보여준다. 무력을 통한 영토 완정(完征)을 처음으로 공언한 것이다. 노동당 전원회의에 등장한 ‘미국과 그 추종 세력들’이라는 표현이 이번 중·러 정상 회담에서 ‘미국과 그 동맹국들’로 그대로 인용됐다는 점도 예사롭지 않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지정학적 격돌 시대에 살고 있다. 미국은 더 이상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아니며 전체주의 국가들은 주변국을 지속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미국은 두 개의 전쟁을 지원하는 와중에도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쿼드(Quad) 오커스(AUKUS), 한·미·일 안보협력 체제를 쉴 새 없이 가동하고 있다. 하지만 갈수록 불리해지는 우크라이나 전황과, 수시로 미국 통제를 벗어나려는 이스라엘과 유럽 국가들 속에서 조 바이든 행정부는 점차 지쳐가는 모습이다. 동맹국인 한국 일본 지도자들의 지지율이 20%대를 헤매고 있는 것도 적잖은 스트레스다. 마치 여기저기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온 사방의 접시를 돌리고 있는 곡예사의 피로를 엿보게 한다.
오는 11월 미 대통령선거 결과에 따라 그 접시들이 한꺼번에 깨질 수도 있다. 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이 중단되면 한국 안보 지형도 전례 없는 불확실성에 휩싸일 수 있다. 그 전에 기민하게 움직여야 한다. 지난해 4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도출된 ‘핵협의그룹(NCG) 설치’와 ‘미국 핵 잠수함의 한반도 전개’ 정도로는 미흡하다. 미 잠수함이 365일, 24시간 내내 한반도 바다 밑을 지켜줄 수는 없다. 러시아 기술이 북으로 넘어가는 정도에 상응해 우리도 미국에 기술이전을 요구해야 한다. 한미원자력협정도 핵연료 재처리를 인정받는 등 언제든 자체 핵무장이 가능한 일본 수준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