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감이 돋보이는 고갱의 ‘사과, 배, 도자기 주전자가 있는 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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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용재의 맛있는 미술관일론 머스크가 인수한 이후로 엑스(옛 트위터)는 엉망이다. ‘내 프로필에 있는 나의 누드’ 같은 스팸이 통제가 안 돼 줄줄이 달리는 한편 추천 탭은 난장판이다. 매일 온갖 다른 주제의 포스트를 ‘어때? 이런 건 좀 흥미에 맞아? 아님 말고’라는 식으로 몰아서 띄워준다. 한동안 ‘매가(MAGA)’ 도널드 트럼프 관련 트윗이 넘쳐나서 진지하게 탈퇴를 고려했고, 최근엔 멧 갈라의 드레스만 물리도록 보여주었다.
폴 고갱
그런 가운데 어느 날은 작심이라도 했는지 갑자기 그림을 쭉 보여주기 시작했다.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우수수 쏟아져 내리는 가운데 하나에 시선이 딱 꽂혔다. 폴 고갱(1848~1903)의 <사과와 배, 도자기 주전자가 있는 정물> (1889)이었다. 무엇보다 균형감이 눈에 바로 들어왔다. 균형감이라고? 얼핏 보면 이 그림의 어디에 균형감이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아무래도 우리가 주로 대칭(symmetry)을 주로 균형이라 이해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정물의 사정은 다르다. 일단 왼쪽으로 살짝 치우쳐 있는 사과가 분위기를 확실히 잡는다. 한두 개도 아니고 다섯 개로 푸짐하게 그림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바로 옆에 그보다 존재감이 조금 덜한 사람 모양의 ‘주전자’가 있고 바로 옆으로 배가 누워 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면서 덩어리가 작아지니 왠지 안정감이 느껴진다. 말하자면 한쪽에 힘을 준 만큼 다른 쪽에는 빼서 균형을 잡아주는 원리인데, 이런 접근은 색상에도 적용되어 있다. 저녁노을을 담뿍 머금은 것처럼 주홍색의 사과에 비해 반대편의 배는 칙칙한 녹색에 절반은 그림자가 져 있다.
그런데 저게 배라고? 제목만으로 그림을 이해하려는 이들에게는 이해가 안 될 수 있다. 아무리 봐도 오른쪽의 물체는 배처럼 보이지 않는데, 그것은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즐겨 먹는, 진한 지푸라기 색깔 껍질의 배는 ‘아시아 배’이고 고갱의 그림에 등장하는 건 ‘서양 배’이다. 서양배는 우리의 배와 사뭇 다르다. 일단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생김새부터 확실하게 구별된다. 꼭지부터 삼분의 일 정도 지점까지는 가늘고 밑으로 가면서 배가 볼록하게 나온 소위 조롱박 모양이다. 맛과 질감도 같은 배라고 불러도 될까 싶게 거리가 있다. 압도하고 통쾌할 정도로 달고도 시원한 우리 배를 좋아한다면 서양배에는 자못 실망할 수 있다.
서양배는 그다지 달지도 시원하지도 않으며 종에 따라 신맛이 꽤 두드러지기도 한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홍옥 같은 사과와 되려 맛이 비슷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그런 가운데 질감은 정말 이게 뭔가 싶을 정도로 푸석하다. 달지도 시원하지도 않고 되레 사과와 비슷한 맛이라니! 푸석한 질감이라니! 이렇게 말해놓고 나니 서양배가 과연 먹을 의미는 있는 과일인가 싶어진다.
하지만 반전이 있으니 서양배는 조리에 아주 잘 어울린다. 익혀 먹으면 맛있다는 말인데, 우리가 배숙을 만들어 먹듯 서양배도 은근하게 조려서 먹는다. 오렌지 껍질이나 계피 등을 넣어 상그리아와 아주 비슷해진 레드와인이나 차, 혹은 취향에 맞게 달고 향기로운 맛국물을 보글보글 끓여 조리면 된다. 후식으로 먹는데 적합한 우리의 배로 만든 배숙보다 솔직히 더 맛있다. 더군다나 서양배는 나름의 향기도 품고 있다. 한국의 많은 과일이 당도 위주로 품종 개량되면서 향이 지워졌는데, 서양배는 아주 달거나 시원하지 않아도 꽃과 거의 비슷한 향이 난다. 이런 특성 때문에 디저트, 특히 타르트(파이)에 많이 쓴다. 특히 좋은 짝인 아몬드와 구운 서양배 타르트는 프랑스의 대표 디저트 가운데 하나이다.
그림의 사과 색깔이 너무나도 생생한 반면 배는 녹색이기에 덜 익은 것인가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아닐 가능성이 높다. 서양배도 품종이 매우 다양해서 다 익어도 녹색 혹은 연두색을 띠는 게 있다. 고갱은 1895년 타히티로 돌아가 생을 마쳤는데, 타히티는 열대 기후라 배가 대표 과일은 아니다. 그림의 배는 아무래도 유럽의 대표 품종인 컨퍼런스(conference) 배로 보인다.
이용재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