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바그너’ 존 윌리엄스의 영화음악에 숨 죽인 객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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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현식의 클래식 환자의 병상일지인류 최초의 영화음악가는 누구였을까. 영화 이전의 사람이지만, 리하르트 바그너라고 나는 생각한다.
5월 19일 리뷰
1876년의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객석을 완전히 깜깜하게 만들었다. 오케스트라 피트도 일부는 무대 밑으로 넣고 일부는 덮개로 가려서 관객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했다. 다른 오페라 극장에선 일찌기 없었던 일이다. 관객이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에만 집중하도록 만든 것이다. 당대의 관객이 바이로이트 무대에서 절대반지의 신화를 보고 들으며 느낀 시청각적 전율은 현대의 영화 관객이 <반지의 제왕>상영관에서 느낀 것 이상이었을 것이다. 바그너의 진전을 이은 우리 시대의 작곡가를 거론할 때 존 윌리엄스를 빼놓고 말할 수 있을까.
▶▶▶(인물 소개) 존 윌리엄스, 영화음악의 거장이자 우리 시대의 바그너
주요인물이나 주제 등에 대한 유도동기들을 만들고, 그걸 엮어서 음악으로 서사를 구축하고, 때로는 스크린에 상황이 벌어지지 않아도 음악으로 스토리텔링을 하는 등, 극음악 작곡가로서 바그너가 선보인 많은 기법들을 망라해 현대의 영화에 맞는 오케스트라 음악을 만들어낸 업적이 크다.
특히 <스타워즈> 주제가는 클래식 오케스트라의 공연에서도 앵콜곡으로 인기가 높다. 어느 해였던가, 런던심포니 내한공연에서 앵콜곡으로 스타워즈 주제가를 연주했는데, 서주가 울려퍼짐과 동시에 객석에서 탄성이 터져나왔고 곡이 끝나자 열광의 도가니가 되어 끓어올랐던 기억이 있다.
콘서트 후반부에는 “새로운 희망”, “클론의 습격”. “루크와 레이아” “시스의 복수” 등 <스타워즈>의 곡들이 잇따라 연주됐다. 가히 <스타워즈 모음곡(Star Wars Suite)>이라 할 만 했다.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의 오케스트라 편곡판 하이라이트인 <노래 없는 반지(Ring Without Words)>에 필적할 현대의 걸작 이었다! 존 윌리엄스의 음악적 변화도 느껴졌다. 1970~80년대 작품에서는 귀에 착착 붙는 주제선율과 금관의 멜로디 연주가 두드러졌다면, 2000년대 이후 스타워즈 시리즈의 음악들은 보다 텍스처가 두터워지고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아나킨과 오비완이 용암지옥에서 광선검으로 사투를 벌이는 장면의 음악은 - 영화를 볼 때도 대단했지만 음악만 따로 연주되는 걸 들어보니 - 처절함을 넘어 숭고함까지 느껴졌다.
아르떼 필진이기도 한 뉴욕의 김동민 지휘자에 따르면 미국에선 이미 스타워즈 모음곡이 클래식 오케스트라의 필수 레퍼토리로서 자주 연주된다는데, 유럽이나 아시아 각국의 일반 콘서트 프로그램으로도 더 자주 채택되지 않을까 싶다. 30년, 50년 후에는 바그너 작품의 축약판인 <노래 없는 반지(Ring Without Words)>가 존 윌리엄스의 스타워즈 모음곡에 밀려나는 비극이 생기지 않을까 우려될 정도다.
객석의 몰입도와 반응도 이례적이었다. 매니아 관객의 비중이 낮은 유명단체 공연은 휴대폰 소음 등 이른바 ‘관크(관람 집중을 방해하는 행위)’가 심한 편이지만, 이날은 콘서트홀에 처음 오신 듯한 분들도 비교적 정숙을 유지한 채 공연에 집중하는 게 느껴졌다. ‘콘서트홀에서 듣는 진짜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이런 거구나’를 경험한 사람들이 앞으로 일반 클래식 공연도 더 자주 찾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음엔 존 윌리엄스 본인이 직접 오셔서 지휘를 해 주시면 좋겠다. 가까운 일본에선 사이토키넨 오케스트라를 지휘해서 <존 윌리엄스 인 도쿄>라고 얼마전에 음반도 나왔던데, <존 윌리엄스 인 서울>도 실현되길 바란다. 1932년생으로 올해 92세라니 시간이 많지 않다.
이현식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