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0여명 기립 박수에 환호성까지…피아니스트 조성진, '프라하의 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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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축제“이곳에서 피아노 리사이틀을 연 지 (벌써) 8년이 지났네요. 시간이 정말 빨리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다시 돌아와 연주할 수 있어 매우 기뻤고, 다음에도 이 자리에서 또다시 연주할 수 있길 바랍니다.”
24일 조성진 피아노 리사이틀
라벨 '밤의 가스파르' 완벽히 소화
초인적 기교와 무한한 상상력 돋보여
리스트 ‘순례의 해’ 中 ‘이탈리아’
치밀한 해석과 격정적 에너지 강조
피아니스트 조성진(30)이 지난 24일(현지시간) 체코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축제'에서 연주를 마친 직후 리셉션장에 올라와 남긴 말이다.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축제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스위스 루체른 페스티벌과 더불어 유럽을 대표하는 클래식 음악제다. 마에스트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레너드 번스타인,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예후디 메뉴인,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아르투르 루빈슈타인 등 그야말로 ‘전설’이라 불린 음악가들이 줄이어 찾은 축제인 만큼, 웬만한 명성으로는 무대에 설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곳으로 유명하다.그 깐깐한 음악제에 두 번이나 이름을 올린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리사이틀은 현지에서 일찍부터 화제였다. 2016년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축제 첫 무대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해외에선 쇼팽 콩쿠르(2015년)에서 막 우승한 ‘신예’에 그쳤던 그가 이젠 명(名)피아니스트 마우리치오 폴리니,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뒤를 이을 만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어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의 위상을 보여주듯 이날 체코 프라하 루돌피눔 드보르자크홀 주변은 공연 시작 1시간 30분 전부터 사람들로 북적였고, 조성진의 포스터 옆으론 사진을 찍기 위한 사람들로 긴 대기 줄이 생겨났다. 공연은 지난 1월부터 이미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오후 8시 5분. 장내가 조용해진 뒤에야 천천히 무대를 걸어 나온 조성진은 박수갈채가 채 끝나기도 전에 건반에 손을 올렸다. 첫 곡은 라벨이 향후 직접 관현악곡으로 편곡했을 정도로 깊은 애정을 표한 피아노 작품인 ‘고풍스런 미뉴에트’. 조성진은 시작부터 섬세한 손끝 감각으로 음 하나하나를 선명히 조형해나가면서 라벨 특유의 오묘한 색채와 우아한 서정을 전면에 펼쳐냈다. 다음 곡인 라벨의 ‘소나티네’에선 그가 탁월한 표현의 소유자란 걸 다시금 확인해볼 수 있었다. 고전주의 형식에 인상주의 기법이 접목된 이 작품에서 조성진은 불필요한 움직임이나 지나친 감정 표출을 배제하고, 선율의 굴곡과 리듬을 예민하게 처리하면서 작품의 풍부한 색채감을 온전히 전달했다.
이어진 작품은 라벨이 작가 알로이쥐 베르트랑이 쓴 동명의 산문시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밤의 가스파르’. 피아니스트에게 초인적인 기교와 무한한 상상력을 요구하는 난곡(難曲)으로 악명이 높다. 첫 번째 곡 ‘물의 요정’에선 마치 건반을 스치듯 가볍게 손가락을 굴리면서 32분음표 트레몰로로 점철된 빗방울의 형상을 더없이 생생하게 들려줬고, 두 번째 곡 ‘교수대’에선 죽음을 암시하는 B플랫 종소리를 셈여림의 폭이 크지 않게 읊조리듯 연주하면서 음산하면서도 묘한 분위기를 불러냈다. 세 번째 곡은 피아노 역사상 가장 어려운 작품으로 꼽히는 ‘스카르보(요괴·교활한 요정)’. 조성진은 건반을 누르는 깊이와 무게, 페달 움직임, 피아노의 배음과 잔향의 효과를 아주 세밀하게 조율하면서 때론 신경질적인 요괴의 목소리로, 때론 기괴스러운 환상으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을 선사했다. 2부는 리스트의 피아노 연작(連作) ‘순례의 해’ 가운데 ‘이탈리아’ 전곡(1~7곡) 프로그램으로 채워졌다. 연주하는 데 50분가량 소요되는 대작으로 이탈리아의 강렬한 풍경과 작가 페트라르카, 단테 등 위대한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받은 영감이 오롯이 담겨있다. 전체를 관통하는 안정적인 호흡, 윤슬처럼 반짝이는 음색, 리스트 특유의 화려한 서정을 흔들림 없이 구현하는 연주에서 그가 얼마나 이 작품을 깊게 이해하고 있는지 가늠해볼 수 있었다. ‘페트라르카의 소네트 47·104·123번’에선 마치 대화하듯 양손을 긴밀하게 움직이면서 응집력 있는 소리를 만들어냈는데, 모든 소절의 셈여림과 음색에 미묘한 차이를 두고 자연스러운 흐름의 변화를 이끌면서도 고음과 저음, 장음과 단음, 연결과 단절 등의 대비는 놓치는 법이 없었다.마지막 곡은 ‘단테를 읽고, 소나타풍의 환상곡(단테 소나타)’. 조성진은 무게감 있는 타건으로 심연으로 빠져드는 듯한 암흑의 정서를 불러내다가도 금세 맑은 색채와 섬세한 터치로 삶에 대한 희망을 드러내면서 ‘연옥(죽은 사람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 남은 죄를 씻기 위해 단련 받는 곳)’에 놓인 인간의 복잡한 심경을 역동적으로 그려냈다. 감정에 지나치게 치우치지도, 기교적인 요소만 과시하지도 않았다. 리스트 작품에서 흔히 기대할 수 있는 뜨거운 열정으로 휘몰아치는 극적인 효과를 떠올렸다면 보다 담백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연주의 완성도는 최고 수준이었다. 그는 정신없이 쏟아지는 수많은 음표 속에서 한시도 흐트러지지 않는 아티큘레이션(각 음을 분명하고 명료하게 연주하는 기법), 치밀한 해석과 균형, 정제된 음색과 제한된 음량으로 선율을 속삭이다가 돌연 두 발이 튀어 오를 정도로 세게 건반을 내려치면서 불러내는 격정적 에너지로 리스트의 음악 세계를 온전히 포효했다.
조성진이 마지막 음을 누르고 마침내 공중으로 손을 들어 올리자, 1200여 명의 청중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게 시작된 뜨거운 환호와 박수 세례는 여섯 번의 커튼콜, 한 번의 앙코르를 지낸 뒤에도 좀처럼 끝날 줄 몰랐다. “명성을 얻기 위해 쇼팽 콩쿠르에 참가한 것이 아니다. 난 단지 음악을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8년 전,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축제 첫 공연 당시 체코의 일간지 호스포다스케 노비니와의 인터뷰에서 조성진이 한 말이다. 순수하게 음악만 쫓겠다던 조성진의 연주는 여러모로 차원이 달랐다. ‘그때도, 지금도 왜 조성진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될 만한 무대였다.
프라하=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