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없는 한 평 사무실에서 화재도 이겨낸 '하콘'의 어떤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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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강선애의 스무살 하콘 기획자 노트며칠 전 사무실 이사를 했다. 2012년에 첫 사무 공간이 생긴 이래로 벌써 다섯 번째 이사다. 약 2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닌 베테랑 노마드답게 우리는 이번에도 새 공간을 알아보고, 계약하고, 공간의 레이아웃을 구상하고, 필요한 집기를 구입하는 등 ‘이사 A to Z’를 일사천리로 마쳤다. 새 공간에 밤늦도록 앉아 옮겨온 온갖 자료들을 정리하다 보니 옛날 공연 사진, 관객들이 남겨준 메시지, 인쇄가 바래 숫자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영수증철 등이 유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첫 번째 사무실 계약서도 그중 하나다. 잠시 속도를 늦추고 그 종이 한 장을 찬찬히 살폈다.
첫 사무실, 창문 없는 한 평 공간에서 출발
도곡동 사무실 화재, 천운으로 큰 피해 막아
잦은 이사 끝에 드디어 '진짜 사무실'로
첫 사무실, 창문 없는 한 평 공간
하콘의 첫 사무실은 종로에서 약 50일간 임대했던 소호 사무실이었다. 그야말로 한 평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책상과 의자 하나 달랑 놓인 1인용 공간이었다. 창문이 없어서인지 공간이 작아서인지 사람이 여럿 들어오면 이산화탄소로 꽉 차는 답답한 느낌이 들었고, 저녁 6시가 되면 건물 전체의 에어컨이, 9시가 되면 불이 꺼지는 데 적응해야 했다. 2012년 여름 페스티벌 직전인 6월부터 7월까지 두 달간 머물며 거의 매일을 늦은 시간까지 일했는데, 에어컨이 꺼지면 간이 선풍기로 더위를 달래고, 불이 꺼지면 경비실에 전화해 자정까지 연장해달라고 요청하며 살길을 찾았다. 가끔 하콘 스태프들과 모여 단체 회의라도 하는 날에는 공간 바닥에 빙 둘러앉고도 모자라 일부는 복도에 몸을 걸친 채로 일을 도모하곤 했다. 그때의 기억은 12년이 흐른 지금도 피부에 진하게 남아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하콘의 1호 직원으로 맞이한 일상의 극명한 대조 때문일까. 사원증을 목에 걸고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출근해 널찍한 개인 책상에서 시작하던 하루가 창문 하나 없는 공유 오피스의 일상으로 바뀐 이야기를 마치 무용담처럼 늘어놓던 나는 이사를 하며 발견한 계약서에서 그제야 박창수 선생님의 고뇌를 보았다. 보증금을 낼 돈도 없던 시기의 어려움이 바로 그 종이에 고스란히 쓰여 있었다.모든 게 새까맣게 타버렸어도 컴퓨터는 그대로
“혹시 우리 그때 운을 다 써버린 것이 아닐까? 천운이었어…”다음 행운은 없다는 듯한 이 섬뜩한 대화는 종로 소호 사무실 다음으로 마련된 도곡동 사무실의 이야기다. 종로에서의 50여 일이 임시 거처 생활이었다면, 도곡동 오피스텔은 정식으로 신장개업한 사무실이었다. 사무실이라는 걸 꾸려본 경험이 없으니 책상 사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비용 절감한다고 커다란 회의 테이블을 책상 대신 사는가 하면, 4명은 너끈히 앉을 수 있는 방법은 생각도 못 하고 한 사람 앉으면 끝나버릴 자리 배치를 하기도 했다. 정식으로 사무실을 출발시킨 이곳에서 직원을 4명까지 늘려 가기도 하며 차차 형태를 갖춰 나갔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는 일들로 많은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이곳에 있다. 그중에서도, 하콘의 모든 역사를 통틀어서도, 가장 강렬한 일은 화재다. 화재 현장을 처음 발견한 건 나였다. 자정을 넘긴 늦은 밤, 아무리 스위치를 눌러도 불이 켜지지 않는 사무실은 그 어느 때보다 캄캄했다. 어둠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벽에 걸었던 화이트보드와 창문 블라인드가 떨어져 있고, 바닥이 심하게 어지럽혀져 있었다. 사무실에서 처음 느껴보는 후끈함도 있었다. 뭔가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박창수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우리 사무실 어떡해요. 도둑... 도둑이... 아니... 그게 아닌데..."하고 횡설수설했다. 정신 차리고 다시 자세히 보니, 이건 도둑이 아니라 화재다. 새벽 두 시가 넘어 119와 파출소, 화재 감식반까지 출동해 온 동네를 시끄럽게 하고서야 이 화재가 방문과 창문을 꼭꼭 닫아 둔 덕에 산소부족으로 자연스럽게 소화된, 하늘이 도운 아주 희귀한 경우라는 것을 알았다. 무엇보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모든 것이 다 타고 없어졌어도, 업무 자료가 고스란히 담긴 컴퓨터와 외장하드만큼은 불에 타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두고두고 놀라운 일이었다.
그 후로 몇 년간 우리는 모니터를 톡톡 두드리면 새까만 잿가루가 나오는 컴퓨터를 사용하며 그날의 일들을 상기하곤 했다.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업무 자료의 공유 드라이브 시스템을 안착시킨 것이나 안전의식은 화재가 우리에게 남긴 흔적이었다.
진짜 ‘사무실’로
종로와 도곡동 이후, 우리는 홍지동으로, 우면동으로, 과천으로 옮겨 다녔다. 잦은 이사는 홍지동 이후 최근까지 박창수 선생님 자택 한 켠을 사무실로 써오며 생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무실과 집을 합치는 건 경제적이었고, 오피스텔을 쓰는 것보다 환경도 훨씬 나았지만, 적응할 만하면 다시 집을 내줘야 하는 세입자의 처지와 잦은 이동이 힘들고 고됐다. 언젠가의 사무실은 ‘신발 신고 들어가는’ 곳이었으면 좋겠다는 농담은 사실 진심이 섞인 희망사항 같은 것이었다. 그런 우리가 집이 아닌 정말 ‘사무실’로 들어왔다. 새로운 국면을 맞은 하콘 사무실을 정돈하며 다시 그 옛날 종로의 한 평 공간을 떠올린다. 보증금도 없던 우리가 이렇게 사무실을 꾸리게 될 줄 그때는 알았을까. 화재에서도 하늘의 도움을 받았으니 앞으로의 천운도 함께해 주지 않을까… 잦은 환경의 변화 속, 그 어느 곳에서도 쉬운 일은 없었지만 결국 버티고 조금씩 나아지며 현재에 이른 만큼, 오늘도 충실히 잘 보내 미래에 우리를 증명해 보이고 싶다. 특히, 구두를 신고 들어오는 사무실, 그건 우리의 작은 희망 아니었던가. 꿈은 이루어진다.강선애 더하우스콘서트 대표